2024년 막바지부터 몸에 이상이 왔다. 잦은 연말 술자리 탓인지 스트레스 탓인지 모르겠지만, 위경련이 찾아왔다가 위염으로 변모했다. 26년 동안 버티던 내 몸이 드디어 경종을 울렸다.
술은커녕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못해서 희여 멀건 한 미음으로 전전했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서 일반식을 먹자마자 바로 토해냈다. 당분간은 미음이었다. 미음처럼 일상도 맹탕 같았다.
힘이 없어서 매주 하던 운동을 하지 못했고 퇴근하고 돌아와 바로 잠들거나 기운이 있으면 넷플릭스를 봤다. 책도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글을 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일상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던 시간들이 사라지고 나자 생각보다 큰 변화가 찾아왔다.
권태기가 온 것이다. 다름 아닌 인생권태기. 처음에는 인생권태기가 왔는지 모르고 단순히 회사 업무에 매너리즘이 왔다고 생각했다. 평소 하던 업무가 지겹고 하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자꾸만 마음이 떠서 이직 공고를 찾아보기 일쑤였다. 회사뿐만이 아니라 직장 동료들과 만나기도 귀찮아졌다. 그냥 혼자 시골로 떠나서 소일거리를 하며 살아볼까라는 막막한 생각도 떠올랐다. 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필요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다가 예전에 예약해 놓은 평창에 다녀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너무 가기 싫고 집에만 있고 싶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잡은 약속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떠났다.
일단 떠나기 위해 회사에서 밀려있던 업무들을 정리했다. 그동안 외면했던 급한 업무들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청소하기 시작했다. 평소 밀린 청소를 하는 주말에 여행을 떠나기 때문에 미리 해야 했다. 그리고 같이 가는 언니들한테 껴서 떠나는 여행이라 가는 길 점심이라도 책임지자는 마음으로 요리를 했다. 간단히 김치볶음밥을 했다. 오랜만에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갑자기 여행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언니들과 차에서 김치볶음밥을 나눠먹으면서 평창으로 향했다. 연차를 내고 금요일에 향해서 차도 안 막히고 금방 도착했다. 그리고 눈앞에 흰색 광경이 펼쳐졌다. 하얗고 너무 하얘서 마음속에 남은 얼룩들 마저 하얗게 지워줄 것만 같은 설원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개인시간을 가졌다. 언니들은 전나무 숲에서 사진을 찍는다 했다. 나는 컵라면을 하나 들고 숲 속으로 향했다. 컵라면을 기다리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작은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요하다는 표현으로 부족할 만큼 고요했다. 이상하게 고요한 이 순간이 너무 따뜻했다. 세상은 원래 이처럼 고요했고 그 순간 소음을 내는 건 오직 나 하나였다. 어긋난 돼지발톱 같은 나를 세상은 언제나 조용히 감싸줄 수 있다, 기다려줄 수 있다 말을 건네주는 것 같았다.
적막을 깨고 면발을 흡입했다.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도 마셨다. 이로써 내 마음의 부요함이 뜨끈히 가라앉았다.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기 전에 세상의 이런저런 요소를 내려놓고 나 스스로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조용히 물었다. 이제 그만 일상에 복귀하는 건 어떻겠니. 다시 열심히 살아보는 건.
yes!!!
일상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 자신과 고독 속에서 온전히 대면할 시간이.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어볼 기회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