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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_술자리 인사

by 황태


애매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 한편에는 과연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근심도 자리 잡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가 돼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면 행복해질 것 같았다. 물론 지금 당장은 내 생활을 일이 영위해주고 있기 때문에 일에 집중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보통 이렇게 힘든 일이 생길 때 인생에 변화가 찾아오는 걸까.


요 근래 수족처럼 따르던 팀장님께 불만이 생겼다. 우리 팀은 업무가 상품구분에 따라 각자 나뉘어 있어 할당량이 비슷하다. (한 명은 채권 한 명은 펀드 이런 식이다.) 하지만 나는 추가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있고(매년 1~3월 동안 500건 정도의 서류를 발급해 등기로 발송하는 일이다.), 경비처리, 간식 구매, 수시 업무 등의 소위 말하는 잡일도 도맡아 하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 회사에서 새롭게 취급하게 된 상품을 나에게 추가로 맡아보는 게 어떻냐고 물어보셨다. 신규 상품 도입 전에 우리 팀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프로세스를 파악해 보라 하셨는데, 솔직히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서 각 유관기관의 고객센터나 담당자에게 연락해 문의하는 일은 힘겨웠다.

내 역량부족 탓도 있다. 나는 심각하게 응용이 어렵다. 시키는 것만 잘하는 사람이랄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매일 근심과 걱정을 가지고 고군분투하다 보니 심적으로 지쳐갔는데 그러던 와중 팀장님, 나, 그리고 같은 직급 팀원 둘과 번개 술자리를 갖게 됐다.



나, 팀원 A, 팀원 B의 상황 설명과 팀장님께서 각자에게 하신 말씀을 정리해 보겠다.


팀원 A : 대학을 다니고 있고 업무도 잘해서 대학 졸업 후 좋은 곳으로 이직할 수 있다.

‘업무를 너무 잘한다. 그래서 올해 꼭 승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대학 졸업 후 좋은 곳으로 이직을 해라.'


팀원 B: 2년 뒤 승진 예정자로 이직을 하게 되면 더 빨리 승진할 수 있고, 업무에 불만이 있음을 어필했다.

‘지금 업무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업무를 올해 말에 주겠다. 너는 팀장 감이니 오래 다녀봐라.‘


나: 잘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사이버대학의 문예창작과에 편입했다. 나는 남들이 보기에 쉽게 이직하지 못할 사람이다.

‘사실 업무 능력은 부족하지만 비서일은 잘하긴 한다. 팀원 B가 넘길 일을 올해 말에 네가 맡아라. 그리고 지금 하던 일은 자동화 개발을 시키고 넘겨라.‘



평소 팀장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던지 숨은 의도를 찾으면서 듣는 편이다. 그래서 저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팀원 A와 B는 당장 이직을 해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붙잡기 위해 좋은 말을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팀장님은 곧잘 편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으셨던 직설적인 말을 대놓고 하시면서 주변 사람들의 경각심을 키우곤 한다. 결코 팀원 A, B가 잘하고만 있지 않음을 알리고 싶으셨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에게 쓴소리를 가감 없이 하시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객관적으로 나는 업무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다. 그냥 실수를 자주 하지 않는 평균치의 역량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술자리가 끝난 후 여쭤봤더니, 최근에 맡은 신규 상품 프로세스에 대해 알아보는 부분이 마음에 안 드셨던 것 같다.)


그동안 잡일을 시키셨던 게 내가 이직가능성이 낮은 사람이라 편하게 시키신 것이었을 거라는 추측성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팀원 A의 업무를 맡기고, 그 업무를 맡기 전에 내 일을 자동화 개발한 후 신규 직원에게 넘기라는 말씀이 서운하게 들려왔다.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지 업무는 부족하다는 말까지. 부정적인 생각을 한 번 하기 시작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래서 그날 집으로 돌아가서 펑펑 울었다.


도피를 위해 이직을 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또는 이직가능성을 계속 내비치면서 좋은 소리 듣고 좋은 대우받는 것이 현실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오만과 편견의 스토리가 떠올랐다.


다아시가 무뚝뚝하고 무례할 것이라 편견을 가진 엘리자베스와 내 생각이 겹쳐졌다. 재벌의 위치에 있기에 사람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다아시처럼 팀장님 또한 윗직급의 사람으로서 본인의 위치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싫어해서 저런 말씀들을 하신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고맙게도 이 상황을 통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똑바로 바라보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꿈을 막연한 상상이라 치부한 채 미래를 외면했던 것 같다. 작가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지레 포기한 채 회사원으로만 살아갈 것이라 결론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렇기에 회사에 팀장님의 인정에 집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회사에 집착을 버리고 다만 나를 먹여 살리는 회사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속으로 외면한 작가의 꿈을 다시 꾸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해나가는 것. 남들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것. 내 직업은 이제부터 행복이다. 나는 행복이 천직이다.


나는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_김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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