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는 그리하여 제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하루하루의 날들이 얼마나 길면서도 짧을 수 있는지
나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하루하루는 지내기에는 물론 길지만, 하도 길게 늘어져서
결국 하루가 다른 하루로 넘쳐나고 말았다.
하루하루는 그리하여 제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어제 혹은 내일이라는 말만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이방인, 알베르카뮈
오늘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 씻고 화장을 한 뒤 교복처럼 걸려있는 옷을 순서대로 골라 입은 채 회사로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고 나서는 탕비실에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떠와놓고 자리에 앉는다. PC를 켜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체크하면서 키보드를 도독 거리는 순간 갑자기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명랑하게 들려왔다.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하기 싫은 일이어야 할 텐데 오늘따라 유난히 내 손가락이 일을 하고 있는 행위가 즐겁게 들린다. 그 소리를 더 듣고 싶어 괜스레 손가락을 자판 위에서 무용하게 튕겨보았다. 오늘은 다른 팀원의 휴가로 대직업무도 추가로 해야 하는 날인데,, 기분이 좋으면 안 되는데,,
금요일은 오늘만 버티면 된다는 마음이다. 목요일은 내일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마음이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에 출근하면 그냥 우울한 마음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버틴다 라는 동사에 의아함이 들었다. 내가 왜 버텨야 하지? 지금 이 키보드를 도독 거리는 게, 오늘의 할 일을 캘린더에 사각사각 적어 내리는 게,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목울대에 머금다 넘기는 게, 눈을 찌를 듯이 비쳐오는 아침 태양을 피해 고개를 뒤로 젖힌 게 이토록 평화롭게 느껴지는데?
업무를 할 때 8시간 내내 쉴 새 없이 바쁘진 않다. 바쁜 날이 있으면 한가한 날이 있고 바쁜 시간이 있으면 한가한 시간이 있다. 숨이 찰 정도로 바쁘고 힘들 때가 있다면 온몸이 비틀릴 정도로 지루한 날이 있다. 이러한 양면성이 인지될 때면 회사 일도 할만하구나 싶다. 무슨 일이든 못 버틸 일은 없구나 싶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썸이니까. 그리고 오늘처럼 운 좋게 한가할 때라면 더더욱 입꼬리가 씰룩댄다. (아 그렇다고 진짜로 안심한 채 씰룩거리면 안 된다. 바로 일이 생기는 수가 있다.)
예전에 시간이 남거나 지루할 때는 SNS를 켜놓고 있거나 쇼핑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디게 가는 시간을 빠르게 보낼 효과적인 방법은 자극적인 SNS에 시간을 맡기거나, 실제로 구매할 법한 것들을 구경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꼭 빠르게 보내야 할까? 내 시간은 27살 2025년 2월 14일 금요일 13시 58분에서 59분으로 지나가고 있는데, 다시 58분이 될 수는 없는 건데.
그래서 크롬 메일창과 엑셀파일 사이에 아주 작은 사이즈로 브런치스토리 화면을 띄워놓았다. 아니 숨겨놓았다. 마치 피난처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숨어있는 작은 창을 킬 때면 마음이 환기가 되면서 숨 쉬는 기분이 들었다. 도피처에 돌아가 생각나는 글감을 적어보거나 쌓여있는 슬프고 화나는 감정을 적었다. 생각을 한 움큼 덜어서 내려놓으니 그 빈 공간으로 청명한 듯한 파란 공기가 들어왔다. 이런 게 환기인지 활력인지는 모르겠다. 또다시 힘을 내서 엑셀창으로 시선을 옮긴다.
15시 50분이 되면 하루 중 가장 바쁘면서도 익숙한 시간이 찾아온다. 매일 반복해서 하는 업무를 동일하게 해 나가면 되는데 그 익숙함이 지겨울 때도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머리보다도 빨리 움직이는 손이 신기해서 물끄러미 쳐다봤다. 신기하지 않은가? 맨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손에 추라도 단 것 마냥 허공을 배회했더라면 지금은 날개라도 단 것 마냥 재빠르게 움직인다. 눈이 실수를 해도 손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익숙함이 준 것인지 노력이 준 것인지. 손을 바라보며 다른 것들도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실수를 하지 않겠지. 좌절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동안 해온 결과만이 남아있겠지. 손에 차곡차곡 쌓여있겠지.
17시 25분 업무를 마무리하고 팀장님의 마감 결재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미 업무의 마감을 끝냈지만 팀장님의 마감이 끝나야 정말로 업무가 마무리된 것이니 기다리고 있다. 퇴근시간인 30분이 지났는데도 팀장님은 과장님과 말씀을 나누시느라 마감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마감을 해달라 이미 20분에 말씀을 드려서 또 말씀드릴 수는 없다. 재촉을 할 수도 없고 기다릴 수도 없고 대화를 끊을 수도 없고 약속에 늦을 수도 없고.... 40분이 됐다. 그냥 과감히 PC를 끄고 나와버렸다. 문득 이렇게 대범한 짓을 저질러도 되나 싶다가도 그래도 회사는 안 망한다며 코웃음 치기도 한다. 그렇게 간이 커져버린 내가 웃기다. 그래서 한 번 더 코웃음을 치면서 회사 생각을 털어버렸다.
오랜만의 약속을 위해 고깃집으로 향했다. 요즘 약속을 웬만하면 잡지 않고 있어서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만 가끔 만나려 한다. 그래서 이전이라면 약속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 그저 잔뜩 신나 버렸다. 양념된 갈매기살과 쫄깃한 막창을 그리고 별 얘기 없이 그냥 얼굴만 보아도 편안한 사람들을 보면서 한껏 웃었다. 편안한 사람들과는 얼굴을 보기 위해 만나는 거니까, 쓸모없는 이야기만 반복한다. 무용한 시간이다. 그러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오늘 먹은 안주들과 섞여서 옷에 한껏 진하게 매달려 있었다. 오늘 저녁을 상기하며 냄새를 한껏 들이마시고 바로 세탁기로 넣었다.
무용함. 무용함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 오늘 나에게 준 힘, 기쁨, 환기, 즐거움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무용한 것들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무용한 것들을 눈치챌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쿤데라
나는 또 한 번 행복이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닷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임을 깨달았다. 필요한 건 그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그리스인조르바, 니코스카잔차키스
인생은 작고 사소한, 눈에 뜨이지조차 않는 일들로 이루어진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