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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by 민형 Feb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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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가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몰라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헤르만 헤세

 


   옷장이 가득 차 있어서 한 번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가득 차있는데 왜 매번 입을 옷은 없다 느껴지는 걸까? 일단 과감히 나중에 팔겠다는 생각으로 입지 않는 옷들을 모아보았다. 멋 모르고 백화점에서 비싸게 산 정장류의 옷들이 가장 많았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옷은 편하지 않고 관리하기 힘들면 손이 안 간다. 그리고 그동안 버리지 못했던 저렴하거나 낡은 옷들을 모두 솎아냈다. 그렇게 모으고 나니 20kg가량 되어 보이는 커다란 짐이 만들어졌다.


   항상 치마걸이가 부족해서 하의를 정리하는 게 어려웠기에 치마걸이의 개수만큼만 하의를 남기고 모두 정리하기로 했다. 무엇을 버려야 할지 고민하면서 가지고 있는 옷들을 살펴보니 하의치고는 형형색색의 옷들이 많았다. 한 때 블로그를 열심히 하면서 최대한 독특한 옷들을 골라 입었었는데, 그런 옷은 반복해서 입을 수 없었다. 매일 특별하게 입으려 해서 옷이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무난한 모양과 색감의 소위 말하는 기본템을 남기고 정리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다음은 겉옷이다. 코트를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만큼 추위도 많이 탄다. 그래서 손이 가지 않는 예쁘고 얇은 코트들을 버리기로 했다. 코트를 사야 할 것 같아서 매일 쇼핑몰에서 찾고 있었는데 신기하게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렸더니 이미 가진 코트만으로도 충분하게 느껴졌다. 제일 비싼 돈을 주고 산 코트와 따뜻하고 두꺼운 두 벌의 코트를 제외하고 모두 정리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문제는 원피스였는데, 한 때 공주병에 걸려서 비싼 원피스를 사재기했었다. 그래놓고 관리가 어렵고 불편해 자주 입지 않았다. 차마 버릴 수는 없어서 30벌의 원피스는 일단 고이 보관해 놨다. 그래도 다행히 여름에는 잘 입을 것 같고 무난한 원피스들이 많아서 오래도록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옷의 착장에 따라 매치하기 위해 잔뜩 가지고 있었던 가방들도 대거 정리했다. 가지고 있는 조금 비싼 가방들은 엄마께 드렸고 너무 캐주얼한 가방들은 동생에게 줬다. 비싼 가방들은 잘 매지도 않거니와 가지고 있을수록 또 다른 가방이 사고 싶어 졌다. 캐주얼한 가방은 1년에 1-2번 정도만 들어서 동생에게 준 뒤로 절대 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외에 저렴하게 샀던 가방들까지 모두 처분했다.


   옷장에는 책과 함께 이것저것 넣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데일리 검은색 가방, 여름과 봄에 들고 다닐 밝은 색 가방, 그리고 경조사 때 맬 수 있는 단정한 가방, 마지막으로 여행 다닐 때 간편하게 들 수 있는 작은 크로스백만 남았다. 더 이상 가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평소 들고 다니는 검은색 가방평소 들고 다니는 검은색 가방


   모든 정리가 끝났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더 결핍을 느낀다. 이제는 더 이상 옷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고 매일 무난한 옷들로 조합해 입다 보니 오히려 옷이 너무 많게 느껴졌다. 주변에서 옷을 사준다고 해도 이제는 거절한다. 새로운 옷이 옷장에 들어오는 순간 더 많은 옷들이 가지고 싶어질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누구나 관심 가져야 할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옷에서 나가는 지출을 줄이고 나니 다른 지출에도 관심이 생겼다. 일단 무분별하게 마시던 아침 커피를 끊었다. 매일 아침마다 바닐라라테를 한 잔씩 마시곤 했는데 잔당 5,000원이라고 생각하면 25일 동안 아침 커피 값만 125,000원이 나간다. 그동안 커피 정도는 마실 수 있지 생각하며 경각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에 충격을 받았다. 주말에도 커피는 꼭 마셔야 한다며 한 잔씩 사 먹곤 했는데 이게 얼마나 낭비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커피를 끊었다. (커피가 몸에 좋지 않아서 끊은 것도 있다.) 내가 커피를 사야 할 때만 가끔 한 잔씩 마셨다.


브런치 글 이미지 5


   커피를 줄이고 덩달아 점심 값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연말 위염으로 한차례 아프고 나서 도시락을 몇 번 싸왔었는데 생각보다 건강에 도움이 됐고 지출도 줄었다. 바깥 음식이 얼마나 자극적이고 비싼지 깨달았다. (우리 회사 근처는 물가가 비싸서 짬뽕이 14,000원, 육회비빔밥이 15,000원, 카레가 13,000원 이런 식이다.) 심지어 나는 한 그릇을 다 먹지 못해 점심 값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건강한 식재료들로 장을 보고 도시락을 싸서 다니기 시작했다. 양배추를 삶고, 야채에 밥을 볶기도 하고, 본가에서 얻어온 나물도 싸왔다. 카드 값이 줄고 덩달아 체중도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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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반적으로 지출을 줄이다 보니 쓸데없이 나가는 돈이 많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됐다. 특히 싸다는 이유로 다이소에서 무분별하게 소비를 하곤 했었다. 이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사지 않는다. (싸다는 이유로 어차피 쉽게 버리게 된다.) 화장품이나 화장솜과 같은 소모품도 끝까지 다 쓸 때까지 사지 않으려고 했다. 부족할까 봐 불안했던 마음과는 달리 생각보다 다 쓰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과자 등 안 좋은 음식을 사 먹어서 나가는 돈도 줄였다. 편의점을 한 번 가기 시작하면 자잘한 돈이 정말 많이 나간다. 또 술을 끊으면서 큰돈이 나가는 술자리도 줄었고 친구들과의 만남도 최대한 줄여나갔다. 소비를 줄여나가면서 절제하는 삶의 즐거움을 배웠다. 내가 가진 것을 덜어내려 할수록 그 빈 공간만큼 만족감이 채워졌다. 만족감이 채워질 수 없을 만큼 가득 소유하고 있다면 평생 만족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내게 카페라는 고민이 생겼다. 처음에는 카페에서 사 먹는 음료 한 잔의 가격이 너무 비싸게 느껴져서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집을 카페처럼 꾸미고 최대한 집에서 시간을 가져보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서는 절대 무언가를 할 수 없고 침대로 향하게 됐다. 의지박약이라 느껴지겠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일요일에 스타벅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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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는 자리만 만들어 놓고 앉지 않았다.


   모두가 무언가에 열중하는 분위기,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 특유의 백색소음, 따뜻한 조명, 그리고 비싼 음료. 그 공간 속에서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분초를 다투며 글을 쓰고 책을 보고 있었다. 집에서 퍼져있는 나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솔직히 행복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 돈은 써야 하는 돈이라고. 다른 것을 아껴서 단 2-3시간이라도 행복 속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다면 투자해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자유로웠다.
나 자신을 위해 온 하루를 쓸 수 있었다.
교외의 오래된 낡은 집에서
조용하고 아름답게 지냈고,
내 책상 위에는 니체가 몇 권 놓여 있었다.

 한 시간을 어떻게 유쾌하게
보낼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걸.

그 모든 것에서는 진정한 명랑함이 나올 수 없어.

데미안, 헤르만 헤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차츰 정립되어 가고 있다. 다른 말로는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 자신을 찾고 나 자신 안에서 확고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차츰 더 나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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