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멈추지 못하는 사람
회의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두꺼운 유리문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짧은 소리를 냈다.
탁.
조금 전까지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있던 회의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긴 테이블 위에는 종이컵 두 개가 남아 있었고, 커피는 이미 식어 얇은 막이 표면에 떠 있었다. 누군가 급하게 넘기던 자료 몇 장이 테이블 한쪽에 삐뚤게 겹쳐져 있었고, 펜 하나가 바닥 가까이 굴러 떨어질 듯 말 듯 걸쳐 있었다.
윤태훈은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간 뒤의 회의실은 이상할 만큼 넓어 보였다.
아까까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노트북 키보드 소리,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로 가득했던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그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빠져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멀리 복도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자료 다시 보내 주세요.”
“내일 오전에 미팅 잡을게요.”
누군가 웃었다.
윤태훈은 그 소리를 잠깐 듣고 있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긁었다.
사각.
그는 노트북을 닫고 가방에 넣었다.
손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마치 몸이 이미 알고 있는 동작처럼,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작이었다.
사무실은 아직 완전히 비지 않았다.
몇몇 자리에 컴퓨터 화면이 켜져 있었고, 모니터에서 나오는 푸른빛이 책상 위를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어폰을 낀 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전화를 하며 창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타닥.
타닥.
타닥.
키보드 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이어졌다.
윤태훈이 지나가자 후배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형.”
윤태훈은 걸음을 멈췄다.
“오늘 진짜 고생하셨습니다.”
후배의 얼굴에는 아직 회의의 긴장이 조금 남아 있었다.
“광고주 완전히 설득됐어요.
대표님도 아까 엄청 만족하던데요.”
윤태훈은 짧게 웃었다.
“그래?”
“네. 형 아니었으면 오늘 진짜 힘들었을 거예요.”
그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윤태훈은 어깨를 한 번 가볍게 움직였다.
“다 같이 한 거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일 오전 발표.
광고 캠페인 수정.
투자사 미팅.
머릿속에서 일정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후배가 말했다.
“형 근데… 오늘은 좀 쉬세요.”
윤태훈은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윤태훈은 잠깐 웃었다.
“괜찮아.”
그 말은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는 늘 그렇게 말해왔다.
괜찮다고.
밤 아홉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회사 건물을 나서자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늦은 봄밤의 공기였다.
조금 전까지 비가 내렸는지 아스팔트 위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고,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길게 번지고 있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물 위의 빛이 흔들렸다.
윤태훈은 잠깐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는 이미 그친 상태였다.
하지만 공기에는 아직 젖은 냄새가 남아 있었다.
젖은 흙 냄새.
아스팔트 냄새.
어디선가 막 문을 닫은 식당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국물 냄새.
그 냄새들이 공기 속에서 천천히 섞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보통이라면 택시를 불렀을 것이다.
휴대폰을 꺼내 앱을 열고, 차가 몇 분 뒤에 도착하는지 확인하고, 비에 젖지 않도록 건물 입구 가까이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걷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조금 걸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골목 하나를 돌아섰을 때
윤태훈은 걸음을 조금 늦췄다.
골목 끝에 불빛이 하나 보였다.
노랗고 부드러운 빛이었다.
밝게 번지는 빛이 아니라,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 있는 빛.
비에 젖은 바닥 위로 그 빛이 길게 번지고 있었다.
윤태훈은 잠깐 그 빛을 바라봤다.
‘여기 이런 가게 있었나.’
그는 이 골목을 몇 번이나 지나갔었다.
그런데 이런 가게가 있었던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는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자신이 오늘에서야 우연히 발견한 것뿐인 장소처럼 느껴졌다.
가게 앞에 섰다.
유리창 너머로 작은 진열장이 보였다.
그리고 빵 냄새가 났다.
버터와 밀가루가 섞인 따뜻한 냄새였다.
그 냄새는 조용했지만 분명했다.
사람을 한 걸음 더 가까이 오게 만드는 냄새였다.
윤태훈은 잠깐 숨을 들이마셨다.
그날 하루 동안 그는 수없이 많은 말을 했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렇게 깊게 숨을 들이마신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문 손잡이를 잡았다.
금속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리고 문을 밀었다.
딸랑.
작은 종이 맑게 울렸다.
안쪽 공기는 따뜻했다.
나무 바닥이 발 아래에서 아주 작게 소리를 냈다.
끼익.
진열장 안에는 여러 종류의 빵이 놓여 있었다.
겹겹이 결이 살아 있는 크루아상.
설탕이 얇게 내려앉은 브리오슈.
표면이 갈라진 둥근 빵.
그리고
조금 투박하게 생긴 빵 하나.
윤태훈은 그 빵 앞에서 멈췄다.
겉은 옅은 갈색이었고 표면에는 얇은 금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저 빵은 뭐예요?”
그가 물었다.
카운터 뒤에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치아바타예요.”
“치아바타요?”
“이탈리아 빵이에요.”
잠깐 침묵.
여자가 덧붙였다.
“천천히 만들어야 하는 빵이죠.”
윤태훈은 빵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천천히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효 시간이 길어요.”
그녀는 빵의 옆면을 가리켰다.
“속에 공기가 많죠.”
"하나.. 주세요."
윤태훈은 빵을 받았다. 그리고 살짝 찢어 보았다.
안쪽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있었다.
그는 잠깐 웃었다.
“…숨이 들어갈 자리네요.”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태훈은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
겉이 가볍게 부서졌다.
속은 부드러웠다.
밀가루 향이 천천히 퍼졌다.
윤태훈은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빛이 달라져 있었다.
햇빛이었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돌로 된 광장이 보였다.
카페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누군가는 빵을 나누고 있었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윤태훈은 작은 카페 테이블에 앉았다.
웨이터가 작은 잔 하나를 내려놓았다.
에스프레소였다.
잔은 아주 작았다.
윤태훈은 잠깐 웃었다.
‘이걸 얼마나 마시라는 거지.’
그는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짧게 지나갔다.
잔을 내려놓았다.
옆 테이블에는 회색 모자를 쓴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앞에도 같은 에스프레소 잔이 있었다.
그런데 잔이 거의 그대로였다.
윤태훈은 잠깐 그 잔을 봤다.
노인은 커피를 마시지 않고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하나가 뛰어갔다.
노인이 말했다.
“커피가 식겠네요.”
윤태훈은 웃었다.
“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잠깐 침묵.
노인이 말했다.
“급한 일이 없으면 커피는 식어도 괜찮거든요.”
윤태훈은 잔을 내려다봤다.
노인은 다시 말했다.
“사람들은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해요.”
노인은 광장을 바라봤다.
“그런데 사실은 시간이 너무 많은 거죠.”
윤태훈은 물었다.
“…많다고요?”
노인은 웃었다.
“그래서 다들 도망가듯이 쓰는 거예요.”
바람이 지나갔다.
윤태훈은 잔을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천천히 마셨다.
아주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그는 다시 빵집 안에 서 있었다.
주인이 물었다.
“어떠셨어요.”
윤태훈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웃었다.
“…아무도 급하지 않더라고요.”
문을 열었다.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골목은 조용했다.
윤태훈은 천천히 걸었다.
이번에는 조금 느린 걸음이었다.
윤태훈이 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가자, 작은 종이 가볍게 흔들렸다.
딸랑.
문이 천천히 닫히면서 골목의 공기가 잠깐 안으로 스며들었다.
젖은 아스팔트 냄새와 밤공기가 빵집 안쪽의 따뜻한 공기와 잠깐 섞였다가, 다시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빵집 안에는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 근처 바닥에 윤태훈의 발걸음이 남긴 아주 희미한 물자국만이 어둡게 번져 있었다.
카운터 뒤에 서 있던 여자는 한동안 그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방금 떠난 사람의 등을 아직도 눈으로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진열장 안에는 몇 개의 빵이 남아 있었다.
겹겹이 결이 살아 있는 크루아상 하나,
얇게 설탕이 내려앉은 브리오슈 두 개,
그리고 방금 전까지 치아바타가 놓여 있던 자리.
그 자리만이 비어 있었다.
여자는 잠깐 그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녀는 조용히 카운터 안쪽으로 돌아갔다.
빵집의 안쪽에는 작은 주방이 있었다.
겉에서 보면 그저 빵을 굽는 평범한 작업 공간처럼 보였지만, 안쪽 벽에는 오래된 오븐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둥근 철문이 달린 오븐이었다.
철문 가장자리에는 오래된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손잡이는 여러 번 닦인 금속처럼 부드럽게 닳아 있었다.
여자는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오븐 문을 열었다.
철문이 열리며 낮고 깊은 소리를 냈다.
쿠욱.
따뜻한 공기가 안쪽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갓 구워진 빵 냄새가 그 공기 속에 섞여 있었다.
오븐 안에는 빵 하나가 들어 있었다.
막 구워진 빵이었다.
표면은 옅은 갈색이었고, 아직 미세하게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껍질은 살짝 갈라져 있었고, 그 틈 사이로 따뜻한 향이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그 빵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손끝이 아주 익숙하게 움직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같은 동작을 반복해 온 사람처럼.
그녀는 빵을 식힘망 위에 올려놓았다.
얇은 금속망이 작게 흔들렸다.
팅.
빵에서는 아직도 따뜻한 열이 올라오고 있었다.
여자는 잠깐 그 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조금 늦게 왔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빵집 안의 조용한 공기 속에서 또렷하게 남았다.
창밖에서는 누군가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발소리가 젖은 바닥 위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여자는 그 소리를 잠깐 듣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빵을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결국은 찾아오는구나.”
그녀는 손을 들어 빵의 표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텅, 하고 속이 빈 듯한 소리가 났다.
여자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오븐 문을 다시 닫았다.
철문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쿠욱.
그 순간 빵집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어디선가 아주 작은 바람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여자는 그 변화를 잠깐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골목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여자는 알고 있었다.
오늘 밤이 끝나기 전에 또 한 사람이 이 골목을 지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