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이 다가온다. 어린 시절 어버이날 선물로 속옷을 가장 많이 했었다. 너무나 알뜰했던 부모님은 속옷을 따로 사지 않으셨고 어버이날이나 생신 때 내가 사준 속옷으로 버티셨던 기억이 난다. 처음 속옷을 사던 날, 제일 고민이 되던 게 색상이었다. 털털한 엄마와는 달리 예민한 아빠는 왠지 선호하는 색상이 아니면 입지 않으실 것만 같았다. 내일이 5월 8일인데 아직 색상을 정하지 못한 나는 상주시장통 부모님의 청바지 가게 앞을 서성거렸다. 내 예상대로 물건 해온 옷을 정리하기 위해 아빠가 깊게 수구리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아빠의 허리띠 틈새로 빤쭈색이 스치듯 보이는 그 찰나. 그 순간을 난 놓치지 않고 내 머릿속 사진기로 재빠르게 찰칵 찍었다.
빨간색, 그런데 밝고 선명한 빨강이 아니라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어두운 빨강... 무슨 색과 비슷할지 그 색깔을 찾기 위해 시장통을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아... 빨강의 색감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구나. 아주 예민한 아빠를 만족시킬 만한 ‘채도’... 포기할 수 없었다. 노을이 지고 시장통이 껌껌해지려 하자 가게마다 조명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내 마음도 점점 초조해져 갔다. 아... 속옷가게 한 시간 내로 곧 문 닫을 텐데... 이제 결정해야만 한다. 간질간질 떠오를 듯 말 듯... 아빠의 최애 빨간색을 꼭 찾아드리고 싶다. 시장 흙바닥으로 고개를 떨구며 걷다 어느 가게 한편에 쌓아 놓은 빨간 벽돌... 찾았다. 딱 이 색이다. 그래 이거구나. 속옷가게 가서 정확히 이 색을 말하리라.
곧 문 닫을 시간이 되어 가게 앞에 한가득 쌓은 물건을 들여놓고 있는 주인에게 난 소리쳤다. “아주머니, BYC 벽돌색 남성용 95 삼각빤쭈 주세요. BYC 없으면 트라이도 괜찮아요.” 뛰어오느라 아직 숨을 고르고 있는 내게 가게 아주머니가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ㅎㅎ 내일 어버이날이라고 아침 일찍들 와서 사가서 BYC는 다 나갔어. 트라이 한 장 남았네. 벽돌색 빨강이 인기가 없는 편이라 그나마 한 장 남은 거야. 내가 예쁘게 포장해 줄게. 조금만 기다려. 아이고~효녀다 효녀 ㅋㅋ” 최고 난제였던 아빠의 선물을 사고 한 숨 돌린 후, 이어서 엄마 꺼는 무난하게 연분홍색 팬티로 바로 골랐다.
아침 일찍 일어나 엄마아빠의 머리맡에 속옷을 올려놓고 야무지게 오빠와 돈을 반띵 하여 함께 준비한 것으로 하였다. 그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니 집 앞 쓰레기통에 너덜너덜하게 구멍 난 속옷 두장이 버려져 있었다. 수없이 꿰매어 입었는데도 옷감이 낡고 삭아서 더는 입을 수 없는 상태까지 간 속옷 두 장을 바라보며 부모님의 알뜰한 내공에 숙연함을 느꼈다. 두 분의 희생을 자식인 저는 추앙합니다. (respect)
그래서일까. 나는 벽돌색 빨강이 참으로 좋다. 세련된 버건디색과는 사뭇 다른 벽돌색을 홀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에겐 부모님의 사랑이 담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색이다.
<나의 애착잠바_벽돌색 빨강 잠바: 이런 나와 같이 다니는 걸 지인들은 창피해하지만 "미안하다, 포기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