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나씨 Apr 02. 2023

비움의 새로운 방법, 기억의 나눔

누군가의 쓸모


동네에 소문난 빵집. 가는곶 세화에 다녀왔다.

굉장히 맛있는 빵집이라고 제주도민들이 엄청나게 추천을 했지만

무려 한 달 반 만에야 가본 곳.



가는곶은 입구부터 모든 것이 평화롭고 설렜다.

들어오는 발걸음을 알아차리자마자

문을 열기도 전부터 인사를 건네주신 사장님과

사장님의 취향이 돋보이는 편안한 인테리어

모든 것이 내 취향이었다.

왜 이곳을 이제야 왔을까.


빵과 커피를 사며 동네 사람이라고 하니

누군가의 쓸모라는 곳의 명함을 건네주셨다.


누군가의 쓸모.

이전에 다른 제주도민에게 추천받은 적 있는 가게였다.

그곳에서는 물건 주인의 추억과 삶을 함께 판매하는 곳이라고한다.



명함을 받고 바로 생각이 나는 건 내 보드였다.

2주 전쯤 제주도에서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것에 도전해 보기 위해 쿠팡에서 산 크루저 보드.


배송을 받자마자 포장을 뜯어 밖으로 나섰고

시작한 지 40분 만에 보드 뒷부분을 잘못 밟고 날아가

왼팔의 힘줄을 끊어지게 만든 그 보드.



가는곶 세화를 다녀온 다음날 그 보드를 들고

명함에 적혀있는 누군가의 쓸모로 향했다.



누군가의 쓸모에서는 내게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판매한다.

하지만 당근마켓에서 파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내가 잘 사용해 온 물건에 대한 기억을 함께 건네준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물건 주인의 인터뷰를 진행한다고 했다.


사장님이 내려주신 드립커피를 한잔 마시며

크루저보드에 대한 나의 짧은 기억에 대해 이야기했다.


왜 이 보드를 사게 되었는지,

어디서 사게 되었는지,

그 보드를 산 나는 어떤 사람인지,



제주도에 내려오며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시작했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해보고 싶지 않던 것 혹은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시도를 통해

내가 진짜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 시작이 보드였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기에 내겐 부상으로 남았지만

그 크루저보드가 누군가에게는 작은 도전이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제주도의 삶의 즐거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왼팔 전체를 깁스로 감고 있지만

그 보드는 나에게 낯선 것에 대한 도전의 상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처음이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되어 온전한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쓸모에 놓인 모든 물건에는 물건 주인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있다)



인터뷰는 너무너무 즐거웠고 사장님은 편안하게 나의 이야기를 끌어내주셨다.

브런치에 쓴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사장님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조언 또한 많이 들을 수 있었다.

1시간이 넘게 앉아있으면서도 지루하지 않았던 공간도 참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쓰지 않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용기 내 닫혀있는 ‘누군가의 쓸모’의 문을 두드리고

자신의 물건과 이야기를 나누러 직접 가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예쁜 기억을 담아가길





아래 글은 누군가의 쓸모 사장님께서 인터뷰 후 나의 시점으로 적어주신 글이다.


이런 공간에서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이야.
낙타님의 질문은 만난 지 몇 분 안 된 사람에게 받기엔 조금 엉뚱하면서도 진지했다.
그래서인지 더욱 격양된 기분으로 대답했다.

“제주에서, 앞으로는 무엇을 하고 싶어요?”
“저는 육지로 돌아가 더욱 치열하게 살고 싶어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가 말한다.

“멜리나 같은 사람은 처음 본 것 같아요. 모두들 제주에 내려와서 여유롭게 사는 삶을 동경하며, 마치 내가 그런 삶을 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냐며 묻곤 해요. 저는 지금도 여기 제주에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데도.”

그의 치열함과 나의 치열함이 조금은 결이 다를지 몰라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성격에서 나오는, 그리고 이제껏 살아온 삶의 관성처럼 멈출 수 없는 내재된 치열함. 치열함 마저 쉼의 한 조각이 되어버리는 사람들. 그는 그것을 경계하라며 조언했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 더욱 치열할 수 있는 불타지 못한 열정이 뜨겁게 남아 있다. 제주 또한 새로운 도전으로 새로운 일을 찾아 잠시 내려왔다.

이 크루저보드는 일이 아닌 쉼 안에서 계획된 작은 도전이었다.
이제껏 육지에서 조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이 보드가 왜 인지 제주에서 더욱 도전해 볼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유튜브를 보고 스스로를 철썩 같이 믿었다. 작은 넘어짐이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고, 연습하면 할수록 실력이 늘고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팔 힘줄이 끊어져 깁스를 하고 나서야 나는 또 쉼이 아닌 일처럼 보드를 해내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 이쯤 되면 이 보드를 떠나보내야겠지.
마음 같아선 나처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도전해 봤으면 좋겠지만,
그 누구도 다치지 않길 바라며.
작가의 이전글 2022년 회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