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지루한 회의. 옆 자리의 동료가 갑자기 전화를 받으며, "네? 아 잠시만요" 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둘러 자리를 뜬다. 회의를 마치고 그 친구를 만나 걱정하며 물어본다. "무슨 안 좋은 일이야?" 그 친구의 천연덕스러운 대꾸. "아니, 회의가 너무 지겨워서 하하."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다"라는 격언을 말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소한 영역에서의 섣부른 솔직함은 오히려 상처와 무례함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과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하기 위해 윤활유처럼 사용하는 악의 없는 거짓말들의 예를 들어보자면...
-"아 차가 너무 막히네요."
(게으름 피우다가 약속 5분 전에 출발했어요.)
-"죄송해요. 제 폰이 죽어서 못 봤어요."
(귀찮아서 읽씹 했어요.)
-"공연 정말 좋았어요!"
(조느라 제대로 못 봤어요.)
-"와 선물 너무 맘에 드네요."
(상품권이나 현금으로 주시지.)
-"너무 맛있어요. 요리사 하셔도 되겠음."
(담부턴 밖에서 만나요.)
-"와 아이디어 너무 좋습니다. 천재시다!"
(이거 어쩔. 책임은 네가 지세요.)
-"아기가 너무 예뻐요!"
(이 말 듣고 싶으신 거죠?)
-"너무 예뻐지셨어요" "늙지를 않으시네요." 류
(분위기 좋게 갑시다.)
하얀 거짓말을 의미하는 손 제스처도 있다. 두 손가락을 교차시키는 이 제스처는 원래 십자가의 가호를 의미했으나 지금은 주로 거짓말할 때 등 뒤에 감춰서 한다. 거짓 약속을 하면서 이 제스처를 하면 벌을 받지 않는다는 알쏭달쏭한 관습이 있는데, 정치인들 등 뒤의 손이 뭘 하는지 늘 의심스럽다.
White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거짓말의 경계는 그 선의와 악의가 늘 불분명하다. 한두 번은 통할 수 있지만 회의 때마다 얼굴을 구기며 전화기를 들고나간다면 상습적인 거짓말이 동료를 불쾌하게 할 것이고, 매번 폰이 죽거나 차가 막힌다면 그 사람의 평판은 결국 black으로 돌아올 것이다.
White Elephant라는 말이 있다. 귀한 흰 코끼리처럼 처음 들여놓았을 때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아무 쓸모도 없고 처치 곤란한 물건을 일컫는 말이다. 거짓말도 그와 같다. 처음엔 편하고 좋아 보여 들여놓다 보면 치울 수 없는 방 안의 코끼리가 되어버린다. 미국에 살면서 이런 코끼리들을 여럿 봤다. 해외에 있다 보니, 나이도 살짝 속이고, 본국의 학력과 출신 학교도 살짝 바꾸고, 심지어 매일 캠퍼스에서 봤는데 가짜 학생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가볍게 시작했던 거짓말이 방 안의 코끼리가 되어버려 자신을 집어삼킨 케이스다.
영화 <페르시안 수업 Persian Lessons> (2020)은 감동적인 거짓의 금자탑을 보여준다. 2차 대전 당시 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인 질은 죽음의 목전에서 우연히 습득한 페르시아 책을 가슴에 품고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한다. 전후에 테헤란에 가서 식당을 열고 싶어 하는 독일군 장교 코흐는 그에게 반신반의하며 페르시아 수업을 요구한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수년간 매일 수십 개의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고 가르치고 다시 새로운 단어를 필사적으로 지어낸다. 생존을 위해 시작한 그의 거짓말은 하나의 방대한 언어체계를 완성하고 질과 코흐는 페르시아어(?)로 대화까지 가능해진다. 물론 패전 후 달아나던 코흐는 엉터리 페르시아어를 하다가 붙들리지만 이 서사는 거짓이 창조해 낼 수 있는 무한의 확장성, 거짓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주객의 전도를 희비극으로 펼쳐낸다.
거짓은 꿈과 같은 욕망의 영역이고 척박한 진실보다 더 매력적이다. 다만, 하얀 거짓말의 눈길을 오래 걷다 보면 길을 잃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