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g the Dog: 꼬리로 몸통을 흔들기. 다른 사건을 이용해 더 중요한 본 사건의 핵심을 묻거나 주의를 돌리려는 정치적인 책략.
이 표현은 1858년 톰 테일러의 희곡 <우리의 미국 사촌 Our American Cousin>에 농담으로 처음 등장한다.
던: 개가 왜 꼬리를 흔드는지 알아?
플로: 오 생각해 본 적 없어.
던: 왜냐면 꼬리가 개를 흔들 수 없기 때문이야. 하하!
1997년 영화 <왝더독 Wag the Dog>은 현실에서 꼬리가 몸통을 얼마나 세게 흔들어 댈 수 있는지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재선을 코앞에 둔 미국의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저지른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위기에 처한다. 보좌진은 대중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 할리우드 제작자를 고용해 먼 나라 알바니아를 적대국으로 만들어 가짜 전쟁을 창조해 낸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긴박한 전쟁 영상으로 스캔들은 묻히고 지지율은 반짝 반등하지만 반대 진영의 견제로 성추행 사건이 재점화 된다. 다시 꼬리로 몸통을 흔들기 위해 이번에는 알바니아 적진에서 포로가 된 가상의 병사 '슈만'의 영웅 서사를 지어낸다. 그를 구하라는 동정여론이 들끓고, 조작된 미디어는 한 영웅의 고난과 정부의 송환 노력, 안타깝고 숭고한 죽음의 드라마를 쏟아낸다. 대중은 열광하고 대통령은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한다.
이 영화가 개봉된 지 한 달 후에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이 터졌다. 기나긴 조사와 탄핵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 동안, 대통령은 수단과 이라크 등에 대한 연이은 폭격을 지시하는 등 '왝더독'스러운 행보로 이 가상의시나리오는 현실의 옷을 입고 화려하게 정치 사전에 등재됐다. 19세기에 모두가 웃어넘겼던 허무 개그는 반전을 통해 엄혹한 정치 현실에 대한 신랄한풍자의 도구로변신한 것이다.
물론 대중은 알바니아 전쟁에 속아 넘어가주던 1997년에서 크게 진화했다. 1인 미디어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고 TV는 더 이상 만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창이 아니다. 정보 창구의 무한 증식, 그간의 학습효과로 인해 '꼬리로 몸통 흔들기'에 대한 의심은 정치와 시사를 바라보는 '상수'가 되어버렸다.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터지고 절묘한 타이밍에 뒤따르는 연예인, 마약, 북풍, 정치인 비리 등 온갖 꼬리의 단골 재료들은 이제 의심 많은 대중의 따가운 시선과 검증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몸통을 흔드는 꼬리의 힘은 대중을 뒤흔드는 여전한 마력이 있다. 영화에서는 전쟁영웅 "슈만을 구하라"는 외침과 그를 상징하는 낡은 구두(슈)들이 거리를 뒤덮는다. "전쟁은 기억하지 않아도 슬로건은 기억한다"는 영화 속 대사는 현재도 유의미하다. 낡은 구두의 이미지 하나가 국가 지도자의 중대범죄를 집어삼켜버린 이 희비극이 21세기의 영악한 대중에게는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몸통을 흔드는 책략과 건강한 담론을 동시에 쏟아내는 미디어는 늘 양날의 검이다. 무엇이 꼬리고 무엇이 몸통인지를 분별하는 만인의 시금석인 동시에, 또 다른 몸통을 꼬리로 보이게 하는 착시 안경이기도 하다. 사건은 기억나지 않고 이미지만 기억나는 슈만의 구두는 지금 나에게 몇 개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