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몰고 헝가리 국경을 넘어 크로아티아로 들어가면서 하늘빛이 달라졌다. 헝가리의 하늘도 파랗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짙푸른 크로아티아의 하늘을 보고 국경 너머 헝가리 쪽을 보니 상대적으로 부옇게 보인다. 태양이 아닌 하늘을 보고 눈이 부시기는 처음이다. 우리나라에도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 분명 있었을 텐데...
참혹한 땅 위의 전장과 푸르기만 한 하늘이 대비됐던 우크라이나 전쟁의 사진이 떠올랐다. 크로아티아도 90년대 세르비아와 독립 전쟁을 겪으면서 큰 비극을 겪었다. 그때도 지금도 하늘은 똑같았겠지. 변하는 것은 구름과 인간뿐...
차로 여행을 하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즐겁다. 첫째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행의 방향과 페이스를 우리가 정할 수 있다는 것. 두 번 째는 대중교통이 미치지 못하는 호젓한 시골길과 작은 마을들을 다니며 둘 만의 모험을 할 수 있다는 것. 이제는 엔티제도 제법 레벨 업된 여행가로서 다음번 숙소를 전날 밤에 찾아보는 세렌디피티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스플리트(Split)의 바닷가를 떠나 다음 목적지인 플리트비체(Plitvicka) 근처의 숙소까지 2시간 반을 운전하고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장권을 예약하지 않아 아침 일찍 줄을 서야 해서 공원과 가까운 숙소로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은 국립공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구글맵을 보니 거의 70km... 아무것도 없는 산밑 들판에 집만 덩그러니...
Ličko Lešće 165b, 53220, 크로아티아
주인은 아주 친절했고 맛난 커피와 초콜릿을 손수 숙소로 가져다줬다. 부킹닷컴에 올린 숙소 사진을 다시 보니 절묘하게 플리츠비체 사진들을 섞어놓아서 뭔가 속은 듯한 느낌... 이거 별점 치료를 해드려야 하나? 툴툴거리며 둘이 커피를 들고 집 앞의 작은 야외 테이블로 걸어 나간 순간 인프피의 탄성....
"와...!"
Serendipity! 우연한 발견의 기쁨! 우리 눈앞에는 하늘과 구름과 땅이 만나 한 폭의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말없이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홀짝... 뭐라 표현할 말을 찾고 있는데 인프피가 시를 읊듯이 감상을 전한다...
"와 여긴 in the middle of nowhere 잖아... 너무나 낯선 곳... 근데 창조의 새벽 같기도 하고... 도로시의 캔자스 같기도 해."
"도로시는 오즈로 날려갔잖아."
"그렇지. 근데 내가 도로시도 아니고 캔자스도 내 고향은 아니지만... 여긴 왠지 고향의 원형 같은 느낌이 들어. 판타지의 이세계처럼 낯선 곳과 창조의 원형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아."
듣고 보니 그랬다. 처음 와보는 낯선 곳이고 새벽에 길을 나서야 할 곳인데, 동시에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석양을 바라보는 듯한 포근한 느낌도 들었다.
플리트비체 이브에 받은 뜻밖의 선물...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하늘과 구름들이 떠올랐다. 그의 초현실 세계에서 그는 푸른 하늘과 구름을 왜 그렇게 사랑했을까...
지금 보는 저 구름은 흩어져 다시는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고, 잠시 머물다간 우리 둘의 흔적은 바람처럼 사라져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연약한 인생이 그런 것 아닐까...하늘은 우리를 기억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