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출발이 좋지 못했다. 일본 호텔에서는 매우 드물게 조식에 문제가 있었고, 결국 우리는 모든 조식을 취소하고 불편한 맘으로 밖으로 나왔다. 우중충한 하늘은 곧 뭐라도 쏟아질 것 같았고 아점을 먹을 식당을 찾아야 했다. 역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핏 보면 이슬비처럼 보일 정도로 작은 싸락눈의 결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참 예뻤다.
둘이 파란 우산을 하나 펼친 채로 후~ 불면 날아가는 눈송이들과 장난을 치며 걷다 보니 근사한 식당이 나타났다.
좁고 붐비던 조식 장소와 달리 막 문을 연 식당은 한산했고, 분위기도 좋았으며 셰프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즉석에서 음식을 조리해 줬다. 참 얄팍한 생각이지만, 잘 대접받고, 잘 먹고 식당을 나서니 잿빛 하늘은 정겹고 젖은 땅은 상쾌했다.
그리고 설렘으로 찾은 어린 왕자 박물관....
봄이나 여름이었으면 더 활기가 있었을까? 앙상한 나무들과 차가운 햇빛을 받은 마을 건물들, 그리고 눈을 맞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어린 왕자와 그 친구들은 추워 보였다. 규모도 크지 않았고 딱히 대단한 볼거리도 없는 소박한 박물관이었지만 왠지 그래서 더 머물수록 정이 갔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생텍쥐베리의 말처럼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눈으로 이 아쉬운 조형물들 뒤에 숨은 그 원형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짧은 순례의 길을 기쁘게 걸을 것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촬영 금지였던) 생텍쥐베리의 방이었다. 역사적인 고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저곳에 앉아서 글을 써보고 싶을 정도로 끌렸던 작가의 공간이었다.
다른 하나는 출구 쪽 홀에서 상영되는 영상이었는데 작가의 짧은 여정과 마지막에 대한 내용이었다. 인프피는 어두운 밤하늘로 사라지는 작가를 보며 훌쩍였다.
"그래. 이 세상이 싫어서 어린 왕자를 만나러 간 거야. (훌쩍) 바이~."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프랑스 패전 후에 미국으로 망명한 그를 비시 괴뢰 정권은 자기들 편으로 선전했고, 드골의 망명정부는 생텍쥐베리가 친 나치라고 공격했다. 괴로워하던 그가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복귀했을 때 나이는 43세, 당시 조종사의 나이 제한은 35세였다. 악화된 건강으로 출격 회수까지 제한받으며 최고령의 그가 굳이 하늘로 날아올라야 했던 이유는... 하늘에 홀로 있으면 그는 세상의 추함에서 벗어나 오롯이 책을 읽을 수 있었기에. 구름의 문이 열리고, 별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사막에서 헤어진 어린 왕자를 만날 수 있었다기에... 하지만, 현실은...
갑자기 엔티제의 짓궂은 TJ 기질이 발동했다.
"근데 생텍쥐베리는 격추된 거라는데..."
FP 인프피의 눈이 약간 세모꼴로 변했다.
"그렇게 생각해?"
"마르세이유 해변에서 한 어부가 발견..."
"그냥 사라진 거야!"
"그렇...지."
비행사는 어린 왕자를 만났고, 어린 왕자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비행사는 어린 왕자를 찾아 헤맸고 어느 날 그도 어린 왕자처럼 사라졌다... 그게 맞는 거다... 사라져야 영원히 날 수 있는 거야....
그런데 또 하나 사라진 게 있다.
글을 쓰며 문득 궁금해서 찾아보니.... 코로나 여파와 시설의 노후로 23년 3월 폐관...
언젠가 다시 찾고 싶었는데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사막이 되어버렸다. 우리 둘의 기억 속 오아시스로 남아있을 뿐...( 촬영 금지였던 사진을 올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But the eyes are blind. One must look with the h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