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어부로 사셨던 아버지는 부지런한 가장이셨다. 새벽에 일어나 논과 밭들의 곡식들을 살핀 후,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앞날 바다에 놔둔 자망을 걷어 올리면 싱싱한 생선들이 올라왔다. 배가 집 앞에 당도해 "경아~ " 하고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아침 짓느라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나는 양동이나 소쿠리를 들고 집 앞 바닷가로 나갔다. 계절마다 잡히는 생선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 탕으로 해서 먹을 것과 구워서 먹을 생선이 달랐다. 나는 특히, 봄에 잡히는 살 오른 노래미로 끓인 미역국, 볼락이나 갯장어를 왕소금을 쳐 석쇠로 구워주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부지런함은 맛있고 건강한 밥상으로 돌아와 자식들을 배 불리고 피와 살이 되어 우리를 키워냈다.
논으로, 밭으로, 바다로 나가는 아버지는 늘 허름한 옷차림이었다. 구멍이 나 버려야 할 옷들도 한 번 더 입고 버리면 된다 하시면 작업복으로 입으셨다. 돌아가시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등에 구멍이 숭숭 난 러닝셔츠를 입은 아버지를 꿈에서 봤다. 꿈속에서도 어찌나 속상하던지. 그런 아버지가 양복을 입는 날이 일 년에 몇 번 있었다. 통영이나 삼천포 시내를 나갈 때, 면사무소에 일 보러 갈 때, 사천에 시제를 모시러 갈 때 등. 그런 날엔 비누거품을 잔뜩 묻혀 턱에 바르고, 면도칼을 긴 가죽 띠에 몇 번 쓱싹쓱싹 문지른 후, 잘 벼린 면도칼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면도를 했다. 동그란 손거울을 드는 몫은 내 역할이었다. 손으로는 거울을 들었지만, 목은 옆으로 빼서 한순간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아버지의 면도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거울을 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아버지의 부름이 싫지 않았다. 거울 속엔 말끔하고 멋진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진 그 당시 어른치곤 키가 컸고 골격도 있어 훤칠한 호남형이었다. 원체 살이 없이 야위셨지만 기본 골격이 있어 양복을 입으시면 태가 났다. 그렇게 일 년에 몇 번 아버지는 멋쟁이 신사가 되었다.
그런 날엔 아침에 나간 아버지가 언제 돌아오시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대문을 몇 번이고 들락거렸다.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린 건 날이 저물기 전에 오셔야 한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아버지가 사 올 십 리 사탕을 기다리는 맘이 더 컸다. 늘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양복 안주머니에선 비닐에 쌓인 하얗고 동그란 사탕이 마술처럼 나왔다. 십 리 사탕이다. 십 리를 갈 때까지 녹지 않고 오래 빨아먹을 수 있어 십 리 사탕이라 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외출은 십 리 사탕을 먹는 날임을. 아버지가 대문을 들어서며 "경아~" 하고 부르는 순간부터 반갑고 설레는 맘으로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아버지의 손이 양복 안주머니로 들어가고. 거기서 하얗고 동그란 십 리 사탕 뭉치가 나오면 배시시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커다란 십 리 사탕을 입에 넣고, 오른쪽 왼쪽 볼로 옮겨가며 침으로 살살 녹여 맛보던 달콤함! 내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과 애정이었음을 그땐 미처 몰랐다.
자신을 위해서는 구멍 난 옷도 못 버리셨지만, 자식들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주셨다. 병약한 체질로 자주 아프셨지만 아버지의 자리를 지키고 자식들을 위해 사시다 가신 아버지.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날 넘치게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해 주셨던 아버지. 짧은 시간 쏟고 가신 그 큰 사랑과 은혜에 늘 감사하며 살아간다. 아버지의 사랑은 내리사랑이 되어 내 아이들을 키워 냈다.
큰오빠는 나보다 열네 살이 많다. 내가 아홉 살, 1978년 즈음에 오빠가 군 입대를 했다. 큰오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사촌 오빠가 군대를 갈 때 큰어머니께서 많이 우셨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군대 가는 아들을 둔 엄마들은 눈물 바람과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우리 엄마도 눈물로 큰아들을 군대에 보냈다. 무탈하게 잘 지내다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때까지 우리 섬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초롱불과 촛불로 지내던 시절이었는데, 큰오빠가 군대 간 그날 저녁부터, 나는 초롱불을 밝히는 담당이 되었다. 오빠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온 가족들의 바람을 담아, 불을 밝히는 정성은 가족들의 위안이며 평안을 비는 의식이었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오빠를 생각하며 초롱불을 밝혔다.
우리의 바람이 닿았는지 오빠는 전방으로 가지 않고 여수에 있는 부대에서 취사병이 되었다 했다. 엄마는 그나마 한숨을 돌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음 해 어린이날이 다가오는 어느 날, 내 이름으로 커다란 박스의 소포가 왔다. 군대 있는 큰오빠가 보낸 것이었다. 소포를 보내고 받는 게 흔치 않을 때라 처음 받아 본 소포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가족들 모두 궁금해하며 박스를 열었다. 동그랗고 납작한 통이 여러 개 나왔다. 그때 이미 두 눈은 동그래졌으며, 입은 벌어져 다물어지질 않고 있었다. 다양한 모양의 쿠키들로 채워진 통에서 맡아지던 부드럽고 달콤한 향은 입 안 가득 침을 모았다. ’ 우리 막내 어린이날 선물‘이라는 오빠의 편지도 동봉되어 있었다.
열 살 인생. 처음 맛보는 외국산 쿠키였다. 그때는 그게 미국산 쿠키인 줄 알았는데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야 덴마크에서 만들어진 쿠키인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마트에서 쉽게 구매할 수도 있지만 80년대 , 특히 내가 살던 섬마을에서는 구경조차 힘든 과자였다. 학교를 마치면 부드럽고 달콤한 쿠키가 기다리는 집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살짝 깨물어 혀끝에 두고 침으로 살살 녹이면 부드러운 형체는 금방 사라지고 입 안 가득 퍼지던 버터 향은 평생 잊지 못할 맛과 향으로 남았다. 큰오빠 덕분에 입 호강한 여러 날들의 추억은 평생 잊히질 않을 사랑과 달콤함으로 남았다.
큰오빠와는 14살, 큰언니는 12살, 10살 차이의 작은 언니 9살 차이의 작은오빠, 7살 터울의 막내 언니를 두고 나는 육 남매의 늦둥이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 비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가 지내던 안방에 우리 형제들이 순서대로 누웠다. 그런 날엔 내가 손비행기를 태워 달라고 했다. 한 사람은 누워서 손과 발로 엎드린 사람을 받치고 올려, 다리를 접었다 폈다, 오른쪽 왼쪽으로 보내 엎드린 사람이 승객이 되는 놀이다. 우리 집 비행기의 승객은 오직 나 혼자였다. 큰언니 비행기가 힘들면 작은오빠 비행기로 옮겨 탔고, 순차적으로 언니들 비행기로 옮겨 타기를 반복하며 놀았다. 그러다 우리 모두 곤한 잠에 빠져들곤 했었다.
자라면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았다. 그 사랑은 따뜻한 시선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해 주었다. 가족의 충만했던 사랑을 먹고 자랐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사랑은 살아갈 힘이 되었다. 아버지, 엄마, 오빠 언니들에게서 배웠던 대로 마음을 나누고 아낌없이 사랑하고 사랑을 주며 살아가려 한다. 내 사랑이 아이들의 삶에도 십 리보다 더 멀리 가도 녹지 않는 사탕의 달콤함이 되었음 한다. 십리 사탕과 쿠키!! 달콤한 추억의 맛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