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은 작은오빠가 고등학교 졸업선물로 받은 것이다. 책 커버를 벗기고 두꺼운 표지를 열면 ' 축 졸업. 이 아름다운 한 권의 시집을 삼가 OO에게 드립니다. 80년 1월 12일 OO 드림'이라는 문구로 첫 페이지가 채워져 있다. 순수하고도 애틋하며 낭만적이다. 고등학생 때 작은오빠는 잘생긴 남학생이었다. 하굣길에 여학생들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쳐 하숙집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오빠 친구들로부터 종종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오빠를 사모했던 한 소녀가 여러 날을 고민하며 고른 것일 것이다. 작은오빠의 졸업선물이었지만 언제부턴가 내가 더 많이 읽고 오래 간직하고 있다. 지난해 부모님 기일에 오빠에게 시집 이야기를 했더니 오빠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 가는 세월을 탓하기로 하자.
중학교 입학을 하고서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라는 시를 알게 되었다. ‘...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이 구절을 읽는데 내 눈앞에서 모란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오래도록 그 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후론 시를 찾아서 읽게 되었고, 우연히 책장에 꽂힌 저 시집을 만나게 되었다. 릴케, 예이츠, 테니슨, 헤세, 베를네에르, 브라우닝, 괴테, 기욤 아뽈리네르, 괴테, 하이네, 에드거알렌 포우 등의 그 당시엔 처음 들어본 외국 시인들의 이름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시를 통해 먼 이국의 들판에 가기도 했고, 센 강변에 앉아도 보고, 길가의 꽃이 되고 별이 되고 바람이 되기도 했었다. 꿈처럼 다가와 내게 스며든 시들이 많았다. 그렇게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깨우고 흔들며 성장시켰고, 어른이 된 어느 날 문득문득 내게로 찾아들어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마산으로 나오면서도 저 시집과 '데미안'은 챙겨 왔다. 40여 년을 지나면서 셀 수 없는 이사를 했지만 지금도 내 책장에 꽂혀 있으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제는 너무 낡고 닳아 모서리 부분들은 너덜거리고 표지도 떨어져 분리가 되었고, 내지도 누렇게 바랬다. 오래되었으니 낡을 수밖에 없지만 좀 더 소중히 간직하지 못한 것 같아 못내 미안하고 속상하다. 낡고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간직하기에는 오래가지 못할 거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헌책을 제본해 새 책처럼 만들어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 일을 하는 곳을 어렵게 알아냈다. 책 상태를 사진으로 보내고 견적을 받았다. 예상외로 비쌌다. 현실적인 문제로 잠시 망설였으나, 그 비용보다 시집이 지닌 의미는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재의뢰를 하고 제본을 맡겨보려 한다. 한 권의 시집,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와 추억이 스며있다. 오래된 종이가 품은 향기를 공유하며, 여전히 명시(名詩)로 남은 시들로 삶의 위로를 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 딸아이에게 물려주고 싶다.
내 청춘의 영혼을 깨운 낡고 오래된 시집(詩集)
오래 찾아보지 못한 고향처럼 그리움과 추억의 향기가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