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누가 보낸지도 모르는 꽃이 내 이름으로 배달된 적이 있었다. 내심 편치 않는 맘이 드러나는 표정을 담은 남편의 시선을 애써 모른척하며 박스를 풀었다. 노랑과 하양의 카라 여러 송이가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며, 내 작은 눈이 사라지는 눈웃음을 만들어냈다. 카라는 내가 좋아하는 꽃 중 하나다. 어쩜 이리도 내 취향을 잘 알지? 꽃을 보고 나니 보낸 이가 더 궁금해졌다. 도대체 누구지? 나 모르게 나를 흠모하는 이가 있는가?? 딸아이가 보냈을까? 보낸 이를 상상하며 잠깐 현실을 떠났음은 비밀로 하자. 누구든 무슨 상관인가? 이미 설레는 가슴은 행복으로 가득 찼는데. 그렇게 가슴 뛰는 밤을 보내고 다음 날 범인(?)이 짠하고 나타났다.
"송여사. 니 좋아하는 카라 맞지? " 절친 K였다. 늙어가는 친구 가슴에 불을 지펴주어 어찌나 고맙던지. 보낸 이를 상상하며 찾는 동안 느끼는 설렘은 또 다른 선물이다.
그렇게 꽃을 보낸 범인은 찾았지만, 아직도 찾지 못한 범인도 있다. 아득한 시간의 저편. 중학교 2학년 초가을, 딱 이맘때였다. 감나무의 감들이 주황빛으로 익어가고,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린 가지를 꺾어 방 안에 걸었다. 가을의 낭만을 방으로 들이던 그런 10월의 어느 초저녁이었다. 그때 아래채에 있는 방을 공부방 겸 내 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창 사춘기를 지나는 시간이라 가족들이 거주하는 위채보다 아래채의 조용함이 좋았다. 그날도 저녁을 먹고 마실을 다녀왔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놓인 포장된 책이 보였다. 겉면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누구지? 말도 없이 왜 여기다 두고 갔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마당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내 이름이 있으니 방으로 들고 와 포장지를 열었다.
'소녀의 기도'라고 적힌 일기장이었다. 모자를 쓴 긴 머리 소녀의 기도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게 담겼다. 교과서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다.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진 집에서 일기장을 꺼내면, 표지와 같은 그림 위에 비닐 커버가 덮여 있다. 부드러운 비닐의 촉감과 반짝임이 있어 고급스러웠다. 내지는 파스텔톤의 연두, 핑크, 블루, 퍼플, 노랑 네 가지 색을 띠었다. 한 색에 스무 장 정도의 두께를 가졌고, 바탕에는 옅은 색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살짝살짝 보인다. 일기장을 펼치면 그림과 시가 함께 하는 페이지가 꽤 여러 장 이어졌다. 소녀감성이 묻어나는 일기장. 그 시절 내게 딱 맞는 감성의 일기장이었다. 사춘기! 그 찬란한 시절의 빛나던 순간들과 마음에 들인 첫사랑의 설렘, 순수한 우정의 이야기가 여백을 차곡차곡 채웠음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누가 준 건지도 모르는 일기장을 차마 채울 수 없어 여러 날을 그대로 보기만 했었다. 친구들에게도 대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지 하는 노파심이 앞섰다. 올케언니와 엄마께도 집에 누가 다녀갔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못 봤다 했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한동안 일기장을 간직하며 바라만 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이야기를 적기 시작하면서 일기장은 소녀의 기도가 담겼다.
4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궁금한 건 사실이다. 누군지 알게 된다면 설레는 유년의 추억을 선물해 줘서 참으로 고마웠노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때 조금 용기를 내보지 그랬냐고 묻고도 싶다. 언젠가 다하지 않은 인연이 닿아 유년의 설렘을 선물한 이를 만난다면, 근사한 곳에서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나누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한 이름 모를 이여!
어딘가에서 아름답게 살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