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19편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

by 조작가Join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피선을 긋기”

보헤미안(Bohemian)들


‘카페 르 콩데’에서 시작한다. 모두 같은 공간에 머물러 있지만, 같은 부류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그들을 엮을 수 있는 단어가 “보헤미안 - 규칙도, 장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방랑 생활을 하는 자 – ”이다.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 같은데, 실제로 주인공은 ‘루키’라고 불리는 여자 한 명이다. 화자 모두 여자와 관련한 이야기만 한다. 여자도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녀의 이야기가 길지는 않다. 다만, 여자가 누구인지 독자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서로 다른 사람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르 콩데’에서 우리는 결코 출신에 대해 서로 묻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도 젊었고, 밝혀야 할 과거도 없었으며, 현재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본문 중』


질문과 의문은 관심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과정이 없다면 관계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같은 시공간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지만, 사람의 페이크(fake) 일뿐이다.


‘루키’ : 등장인물들의 ‘정점’


여자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빠가 없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다. 엄마도 평범한 직장인이 아니다. 솔직히 어떻게 딸을 키웠는지 알 수 없다. 문학의 매력은 설명이 어려운 부분은 과감하게 잘라 버릴 수 있는 데 있다. 그래서 허구다. 어쨌든 그녀는 매력적으로 성장했다.


매력 있는 젊은 여자가 카페에 나와서 사람들과 교류한다. 나이가 든 사람도 그녀보다 어린 사람도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사라도 한 번 더하고, 함께 어울리려고 한다. 겉모습이 인간의 모든 게 아님에도 사람들은 일단, 겉모습에 깊이 심취한다.

피상적 관계는 어쩔 수 없이 내면이 아닌 외면을 추종하게 돼 있다. ‘루키’는 ‘르 콩데’에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들만의 ‘정점!’


그러나 보헤미안들에게 정점은 어울리지 않는다. 몇 개월을 마주했지만, 진실은 모른다. 오히려 그런 상태를 잠재적으로는 편하게 여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정점을 찾으려 한다. 그러다가 조금 – 정점이 - 보일 듯하면 “대도시의 익명성 속으로 사라져 버리리라.”


‘잃어버린 젊음’


‘잃어버린 젊음’이다. 젊음을 잃었다는 의미일까? 화자들은 나이가 많지 않다. 탐정이라 생각되는 사람만 나이가 있다. 그런데 무슨 젊음을 잃었다는 것일까? 오히려 잃어버린 젊음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젊음이 어울리지 않을까? 매일 만나지만,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이름조차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공유하지 않는다.


“대체 무슨 권리로 우리가 타인의 삶에 불법 침입을 하며, 또 얼마나 오만불손하게 그들의 깊은 속마음을 뒤진단 말인가…… 무슨 자격으로?” 『본문 중』


철저하게 타인으로 남길 원한다. 그게 그들만의 배려이고 생활 스타일이다. 공동체는 울타리가 설정된 구별, 혹은 차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진 게 없기에 잃을 것도 없다. 그러나 작가는 ‘잃어버린 젊음’이라고 썼다. 주인공 이야기를 해보자. 아빠가 원래 부재하다. 엄마도 돌아가셨다. 어렵게 직장을 얻었고, 그 직장의 상사와 결혼한다. 왜 결혼했을까?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 인간은 안정적인 삶 – 정점 - 을 추구하니까.


“그날 저녁 그는 혼자 아파트에서 자신이 정녕 자클린 들랑크와 결혼을 했는지 궁금해했다고 한다.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유일한 증거는 결혼식 후 그들이 건네받은 가족증명서였다. 가족증명서.” 『본문 중』


그러나 ‘가족증명서’가 모든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원래 정상은 처음부터 가진 게 없었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래 가진 게 없었던 삶에서 잃어버릴 게 마련된 삶은 적응이 필요하다. 그녀에게 결혼이라는 안정적인 삶은 어색하다.


작가는 주인공을 밀어 버린다


작가는 주인공을 죽인다. 스스로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게 한다. 그녀를 잡으려 했던 사람도 있지만, 잡을 수 없음을 깨닫고 포기한다.


잃어버릴 게 없는 사람도 소유하고 있는 게 있다. 바로 생명이다. 작가는 삶과 생명을 구분한다. 카페에 모여있는 사람들 - 대체로 ‘루저’ - 에게 삶이란 정점 없이 떠도는 것이다. 상처 받고, 서로 위로조차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부대끼며 살아간다. 그들은 정착할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노마드가 된다. 어쩌다가 얻은 정주(定住)의 기회도 스스로 포기하기 일쑤다. 정착은 곧 죽음이다. 살아있는 죽음.


그러나 생명만큼은 그들의 것이다. 유지할 수도 있고, 던져 버릴 수도 있다. 누구나 살아있는 한, 목숨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물론, 몸을 창밖으로 던지기 위해서는 용기나 굉장한 낙심이 필요하다. 더 살아있을 이유가 없을 때 몸을 던질 수 있다.

작가는 주인공을 밀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은 그게 자유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됐어. 이제 마음대로 가렴.” 『본문 중』


버릴 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이름조차 타인에게 알리지 못하고, 나이나 사는 곳, 과거까지도 솔직히 전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삶은 진실이 붙어있는 삶이 아니었다.


도피선


“도피선 펠릭스 가타리와 질 들뢰즈가 사용한 개념으로, 운명의 힘 또는 미래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부여한 단단한 선과 그 선 주위, 가족사나 숨겨진 욕망, 몽상 등을 나타내는 부드러운 선,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변천을 정의하는 개념이자 통제할 수 없는 과정으로 운명과 반대되는 선인 도피선이 삶의 세 가지 선을 이룬다고 한다.” 『역자 주』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다. 프랑스 철학의 매력이기도 하다. 읽히지만, 현학적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딱딱하고 어려운 독일 철학보다 생각할 게 더 많다. 작가는 ‘도피선’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세 가지 선을 작품으로 보여줬다. 고아가 된 루키, 그녀의 삶은 뻔하다. 길거리 여인이 되거나 결혼하거나. 그녀는 안정에 대한 바람과 욕망을 가기조 있었다. 그래서 결혼한다. 현실에서는 그 정도 되면 만족스럽게 종료된다. 평범한 주부로 아이를 키우고 할머니가 돼서 죽을 날을 기다린다.


그런데, 작가는 도피선을 긋고 싶었다. 그녀는 정해진 경로를 벗어난다. 이제부터는 예측 불가능이다. 루키는 가족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달아났다. 자신의 이름, 나이 등 흔히 말하는 정체(identity)를 벗어던졌다. 원하지 않았던 결혼과 남편에게서도 벗어났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성들의 시선과 관심에서도 지워지길 원했다. 이제 끝이 보인다. 남아있는 생명을 기꺼이 던진다.

스토리는 간단하지만,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우울한 청춘들의 비극적인 삶 정도로 느껴도 큰 문제없다. 그런데, 가슴을 맴도는 여운은 그렇게 종료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조금 다른 이야기


도피선 개념을 만든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역시 고층 빌딩에서 몸을 던져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했다. 워낙 뛰어난 철학자였기에 그의 철학을 숭배했던 애독자라면 아쉬울 만한 죽음이었다. 자살의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게 운명에 순종하지 않겠다는 그만의 저항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종교에서의 죽음, 도

덕에서의 죽음은 모두 부정이다. “죽을 정신으로 살아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반적으로 자살은 부정적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누(累)가 된다. 최소한 슬픔을 준다. 그러나 그런 슬픔조차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몸을 던지는 행위는 더 바랄 것 없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앞으로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하리라. 오늘부터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며, 내 열정을 잘 간직하도록 그가 방금 적은 것을 지워줬으면 했다. 나는 그에게 다른 사항들, 다른 이름들을 대고, 상상 속의 가족, 내가 꿈꾸었을 가족 이야기를 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본문 중』


루키의 자살 소식을 들은 ‘롤랑’도 슬픔보다는 아쉬움과 당혹감을 느꼈을 뿐이다. 이후에 남편이 소식을 들었더라도 슬픔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동정 정도가 최선이지 않았을까?


“진정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알 수 없는 부분까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본문 중』


이런 사랑이 있었다면? 루키의 삶은 공중이 아니라 지면(地面)에 여전히 붙어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젊음’은 등장할 수 없다.


카페에 앉아서


제목에 나오는 ‘카페’라는 단어에 몰입해 글을 쓸 때 카페에 앉아 있었다. 마침 장마철이라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볼 수 있었는데, 내리는 비만큼이나 주변 사람들이 수시로 흘러갔다. 그들의 대화는 소음으로 들릴 뿐,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 나면 어느 날 사람들이 사라져 갔고,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심지어 진짜 신분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본문 중』


다들 목적이 있어서 카페에 왔을까? 커피를 마시려고, 책을 읽으려고, 일하려고. 카페는 다른 목적이 있는 사람들의 같은 시공간이다. 철저히 ‘남’이다.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와 지금 내가 머물러 있는 카페는 다르지 않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작품 속의 카페에는 진실과는 거리 있는 대화를 하고, 서로 알지 못하는 상대와도 잘 어울리는 보헤미안들의 시공간이라는 점이다.


익명은 편리하다. 그래서 외롭기도 하다. 익명의 편리 속에서 네티즌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외로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몸을 던지지는 않는다. 단, 우리나라는 다른 데 보다 조금 더 자주 목숨을 끊는다.


“그녀는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도망하고, 항상 더 멀리 도피하며, 난폭한 방식으로 일상적인 삶과의 관계를 깨고자 했던 것이다.” 『본문 중』


루키는 스스로 몸을 던졌다. 아마 지면에 도착하는 찰나의 순간 동안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현실의 투신 중의 얼굴은 고통으로 점철된 모습이다. 같은 죽음이지만, 과정과 원인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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