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상 읽기 : 3부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1)

4차 산업혁명 시대, 기독교를 말하다

by 조작가Join

나는 한 시간 크리스천이 아니다!


한국에 개신교는 19세기에(1832년 유대계 독일인 루터교 목사 칼 귀츨라프에 의해 한국에 처음 개신교가 전파됐다) 들어왔다. 약 200년에 가까운 역사이다. 이 기간에 우리 외가(外家)는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필자가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4대째 이어서 기독교 집안이 됐다. 혹설에 따르면, 기독교 집안 3대 이상에 이르면, 그 후손들이 사회·경제적으로 괜찮게 산다고 하던데, 애석하게도 필자는 그렇지 않다. 여전히 가난하고, 사회적으로도 큰 존재감이 없다.


사도 바울은 본인이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나 바리새파 가마리엘 문하에서 수학하고,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갖고 태어났다고 했다. 필자는 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4대째 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선교사가 설립한 대학교(연세대학교)에 다녔으며, 선교단체에서 훈련받고, 기독교 시민운동가로 살았다. 그리고 청소년들을 양육하는, 흔히 말하는 간사 역할도 10년 이상 경험했다. 참 다양하게 경험했고, 사역자로 20년 가까이 살았다.

장황하게 기독교 약력을 적는 이유는 필자가 ‘선데이 크리스천(일주일에 일요일 한 번만 교회에 가는 사람)’, 혹은 ‘한 시간 크리스천(예배 시간 한 시간만 교회에 머무는 사람)’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도 아니면서 네가 교회를 어떻게 알아?”라고 할 수 있는 의문에 선 답으로 필자의 과거 기독교, 교회와 관련한 내용을 조금 언급한 것이다.


교회에 다녔다


교회에 혼자 다니기 시작한 지 35년이 넘었다.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6살짜리 아이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어느 시장 초입 상가 건물 2층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도 교회는 나갔다. 외할머니, 혹은 어머니와 함께.

신기하게도 대부분 아이가 다 믿는 산타할아버지는 6살 때부터 믿지 않았지만, 교회에 가면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변함없이 믿고 있다. 단, 교회에만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제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교회에 다닌 시점은 초등학교 때부터다. 친가 쪽으로는 불교만 4대째 내려오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조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조부의 허락을 얻어야만 했다.


필자 : (간곡한 목소리로) 엄마, 여기도 교회가 있는데, 다녀도 돼요?

어머니 : (웃으면서) 다녀도 되는데, 대신 할아버지께서 허락하시면 다니도록 해.

필자 : (신나서) 알았어요!


어머니 허락은 쉽게 떨어졌는데, 할아버지의 말씀이 중요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의 신앙을 결정하는 데 부모와 조부모의 허락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촌락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 허락을 받은 나는 방앗간에 계신 할아버지를 찾아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올라갔다.

필자 : (기대에 찬 목소리로) 할아버지 저 교회 다녀도 돼요?

할아버지 : (잠시 고민하시다가) 그래, 저 위에 있는 교회 말이지?

필자 :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네, 맞아요. 서울에 있을 때도 다녔어요.

할아버지 : (웃으시면서) 그래, 다녀도 된다.


필자의 할아버지는 자상한 분이셨다. 특히, 손자를 너무 사랑하셔서 원하는 것은 대부분 들어주셨다. 하지만 사랑하는 어린 손자가 본인 생각보다 더 열심히 교회에 다니자 불안하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 : (차분한 목소리로) 네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뭐지?

필자 : (진지하게) 좋은 말씀도 듣고, 공책도 받고, 좋은 점이 많아요.

할아버지 : (진지하게)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공책 500권을 사줄 테니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어떨까?

필자 : (고민하지 않고) 그럴 수는 없어요. 한 번 다니기로 한 거니까, 끝까지 다녀야 하죠.

초등학교 1학년, 8살 봄에 있었던 일이다. 그 후로 할아버지께서는 더는 만류하지 않으시고, 손자가 기독교인이 돼 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셨다. 종종 명절 때 작은아버지들의 강압적이고 노골적인 방해도 있었지만, 한두 번에 불과했다. 오히려 가정 형편상 자주 이사하면서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해서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이 됐다


‘그리스도인이 됐다’라는 말은 교회는 오래 다녔으나 신앙적인 성숙과 발전은 정체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신앙의 정체와 고착화는 많은 신앙인이 교회를 등지는 원인이며, 모태 신앙으로 태어난 청소년들이 스스로 신앙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나이가 됐을 때, 교회에서 떠나는 이유이다.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대부분을 기독교인으로 살았고, 지금도 기독교인이고, 앞으로도 기독교인으로 살 예정이다. 신앙인으로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그만큼 신앙의 연륜이 쌓여서 성숙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연륜과 성숙은 비례가 아니며, 직책 –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등 – 과 성숙도 비례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비례하는 모습을 보여서 현 시국처럼 답답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다. 교회 역사가 길어질수록 성숙(발전)한다면 좋을 텐데, 반드시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긴 역사만큼 성숙하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교회는 20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한국 종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됐다. 수적으로나 자원적으로나 거대한 힘을 지닌 종교가 된 것이다. 이런 거대한 종교가 성숙하지 못하고 역으로 퇴보했다면? 그 부정적인 영향력을 사회와 국가가 고스란히 받게 돼 있다.


교회가 성숙하지 못하면 우선 교회에 다니는 개인의 신앙에 좋지 않다. 예를 들어 사이비 종교에 빠진 신도들을 볼 때 그들의 열성적인 종교활동은 가정과 사회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영향력이 적지 않기에 종교 패권주의를 앞세울 경우 상식적인 사회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 최근에 일부 개신교가 앞장서서 준비한 광화문 집회나 이후에 진행하려 하는 집회 등 모두 종교 패권주의를 앞세운 비합리적인 결단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앙의 성숙을 언급하면 “신앙은 보이지 않는 부분인데, 어떻게 성숙과 발전을 따질 수 있는가?”라는 비판이 제기되리라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이런 비판은 맞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의 현 상황을 따져보자. 일반적인 여론과 보도 내용을 훑어봐도 긍정적인 내용보다는 부정적인 기사와 응답이 많다. 그리고 대표적인 3대 종교와 비교했을 때 윤리적인 수준이나 선호도에서 계속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청소년과 청년들 교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조부모, 부모 세대가 열심히 다녀도 그 자손들은 교회를 벗어나려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조부모와 부모의 삶이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모습과 일치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과감한 글쓰기


이 글은 4차 산업혁명과 한국 교회를 주제로 했다. 필자는 이미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서 국가 편과 지역 편을 다뤘다. 국가 편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비판했고, 지역 편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 – 인재, 자원, 고령화, 인구 유출 등 – 로 인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낙후될 지역 상황을 개괄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필자의 종교인 기독교(개신교)와 4차 산업혁명을 연결하고자 한다.

왜 과감한 글쓰기인가? 우선, 주제가 희소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본(本) 주제와 관련한 책을 읽지 못했다. 필자에 앞선 저자가 없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려고 한다.


다음은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와 관련한 일반적인 인식에서 탈피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의 관계는 상보(相補) 하지 않고, 상충(相衝)할 거라 보고 있다.


과학 기술과 종교 관계는 이해 방식에 따라 ‘서로 상보적으로 보는 부류’, ‘서로 무관하게 갈 길을 가면 된다고 여기는 부류’, ‘서로 상충한다고 보는 부류’가 있다. 그중에서도 ‘서로 상충한다고 보는 부류’의 예를 든다면,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를 대표로 하는 그룹이다. 그는 현재도 종교의 허구성을 밝히려 한다. 그들의 무기는 지속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이다. 지속적인 과학 기술 발전으로 현재 종교가 제시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근거들이‘망상’(『만들어진 신』참고) 임을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역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 갈 과학 기술의 발전과 교회 발전(성숙)이 동시에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에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제안할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교회가 기존 시스템(존속 혁신)에 머물다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막기 위해서 새로운 시대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스스로 혁신해야 함을 주장할 것이다. 즉, 한국 교회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을 제언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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