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상 읽기 : 3부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7)

한국 교회는 보수가 아니다

by 조작가Join

한국 교회는 보수일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등과 같은 베스트셀러를 저술한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프레임’이라는 개념을 활용해서 보수와 진보를 설명하는데, 보수를 ‘엄격한 아버지’, 진보를 ‘자상한 아버지’로 이미지화했다. 저자에 동의하는 지지자들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만한 주장이고 반대편에서는 저자의 편견이라고 생각하고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수 이미지를 강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 이미지는 미국의 보수와 다른 의미인 듯하다. 현재 사용하는 보수의 의미는 미국식 보수가 아니라 ‘폐쇄’, ‘수구’, ‘꼰대’의 다른 말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정치권에서는 진짜 보수 논쟁이 있었다. 그 결과로 ‘바른정당’이 창당됐다. 그리고 대선 이후 ‘바른미래당’에 통합됐다가 현재 진정한 보수를 외치던 정당은 사라졌다. 정치권에서 논하는 ‘보수’의 의미는 역시 정치공학적이고 야합 수준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수는 무엇일까? 그리고 한국의 보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현재 맡을 수 있는 보수(保守)의 향기


‘보수’의 사전적 의미는 ‘보전하여 지킴’이다. 흔히, 지킨다는 표현을 사용하면, 가치 있는 것을 지킨다는 의미다. 하지만 가치(價値)는 시공간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시공간마다 차이가 있다. 즉, 지켜야 할 대상이 다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왕은 곧 국가였고, 전부였지만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탄생한 우리나라는 왕이 사라졌고, 따라서 왕조가 추구했던 가치를 지킬 필요가 없다. 물론,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정치적 권위주의는 오랜 기간 이어졌다. 하지만 그 수준을 과거 왕의 절대 권력과 비교할 수는 없다. 아무리 극단적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이더라도 현재 정치체제에 왕을 옹립하자는 집단은 없다.


그러나 모든 현상에는 예외가 있는데 대구에서 탄생한 ‘우리공화당’의 출마자들은 전 박근혜 대통령을 대한민국과 등치(等値) 하는 ‘웃픈’사고방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로 선거 기간 동안 전 박근혜 대통령을 대한민국이라고 했으며, 현재까지도 주요 거리에서 무죄 석방 서명을 받고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 보수를 떠올리면 거부감이 느껴진다. ‘수구꼴통’과 ‘보수’가 거의 같은 이미지로 인식되는데, 진보를 빨갱이로 치부하는 논리와 유사하다. 그러나 원래‘보수’의 의미와 뜻은 우리나라에서 느껴지는 파리지옥과 같은 이미지가 아니었고, 변화를 무조건 거부하는 폐쇄적인 의미도 아니다.


보수의 정신 :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를 중심으로


『보수의 정신』저자 러셀 커크(Russell Kirk)는 보수의 역사를 영국의 정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에서부터 시작한다. 버크는 기본적으로 신의 창조를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신이 만든 세상 질서를 존중하고, 현재는 과거의 역사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강조한다.

그에게 세계 질서는 다양한 계급을 바탕으로 한 신분 질서였는데, 이 또한 성경적 기준으로 판단했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고대 사회의 계급을 인정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단, 버크는 위계질서를 존중하되 억압적인 구조는 거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상을 가진 버크의 사상은『프랑스 혁명 성찰』에서 드러났는데, 모든 계급을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소멸시킨 프랑스 혁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예언과 같은 주장을 했는데, 결국에는 힘에 의한 지배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했다(여기서 말하는 힘은 군사력과 관련한 것을 의미한다. 결국, 나폴레옹이 권력을 차지한 것을 봤을 때 버크의 예언은 적중했다). 또한, 왕과 왕비를 죽이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신분제를 전복시켜서 모든 민중의 평등을 주장했던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폄하(貶下)한다.


버크는 당시 프랑스가 안정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했는데, 과도한 폭력으로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오히려 변혁의 가능성을 제거했다고 주장한다. 이후 한나 아렌트도 『혁명 이론』에서 프랑스 혁명은 실패한 것으로 설명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세계 역사에서 진보의 상징이자, 정의로운 혁명의 상징이지만 보수의 눈으로 볼 때는 폭력으로 얼룩진 불한당들의 모반(謀反)일 뿐이었다(개인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위상에 대해서는 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당시 혁명 세력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거부했다. 그렇다면 ‘신’ 대신 다른 대체자가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대체자는 ‘이성’이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신에서 보이는 인간의 이성. 이러한 사상의 근저에는 이성이 발전을 거듭하면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Uber-mensch)’의 단계에 도달할 것으로 상상했을 수도 있다(위버멘쉬는 사실 인간의 이성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위버멘쉬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성에 대한 기대가 바로 ‘초인’에 대한 기대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은 현실과 달랐다. 보이지 않는 신이 사라지면 보이지 않는 이성으로 새로운 시대를 창조할 거로 생각했지만, 기존 세력이 도태되고 나서 등장한 세력은 새로운 엘리트였다. 따라서 버크는 혁명은 지배 세력을 바꿀 뿐이지, 사회 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수는 이러한 전복을 반란으로 생각하여 혁명이라 인정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혁명의 폭력성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 자체의 발전과 완전성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분제도를 신이 만든 것으로 받아들여서 그 질서 속에서 각 신분에 맞는 역할대로 살아가야 세계가 시계처럼 움직일 수 있다고 인식했다.


성경은 진보와 보수의 절묘한 줄타기이다


예수는 신약에서 가난한 자, 병든 자 등의 친구로 등장하고 어린이와 여성의 지위를 한껏 끌어올리는 혁명적 언행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창조주를 인정하고 각 개인 역할의 다름을 인정했다. 이후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했고, 바울도 위정자의 권세를 존중하라 하면서 당시 제도 전복과 관련한 정치적 혁명사상을 전파하지 않았다.

물론, 혁명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분석하면 충분히 근거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 도덕적 혁신은 주장했지만 체제 전복적인 사상을 직접 언급한 곳은 없다. 오히려 ‘칼로 흥한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라 자처하는 세력이 교회를 적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랑스 혁명에 참여한 민중은 교회를 파괴했으며, 이후 발생한 공산주의 혁명도 기독교를 배척했다. 특히, 마르크스는 종교는‘인민의 아편’이라 하면서 기독교를 적대시했는데, 실제로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수많은 종교 박해가 자행됐다.


그렇다고 해서 보수가 현재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고 보전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버크는 ‘발전적 변화’를 주장했다. 기본적으로 보수 정신은 세상은 다양한 구성원들로 구성돼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토론의 과정을 거쳐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의 절대 이성을 인정하지 않기에 인간의 실패 가능성을 열어두고, 공동체의 협력을 통한 질서 유지를 선호한다.


북한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보수는 ‘빨갱이 이데올로기’로 무장했고, 가상의 적을 세워 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그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국에는 진정한 진보가 없고, 보수만 있다는 주장을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도 북한이 있어서 진정한 진보 세력이 살아 숨쉬기 힘든 정치적 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보의 씨앗조차 뿌리기 힘든 상황이다.


현재는 보수도 진보도 없는 듯하다. 한국 교회가 보수의 상징이라고 자처하려 하지만, 온전한 보수 정신은 보이지 않고, 세상과 담쌓고 경계를 만들어 스스로 거룩한 척하는 고독한 ‘성’이 됐을 뿐이다.


성경에는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종종 등장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교회는 보수나 진보를 자처해서는 안 된다. 창조 질서를 존중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여 돌봄을 실행해야 하고, 하나님 아래 모든 인간의 평등함을 인정해야 한다.

사무엘서에서는 사사 시대가 끝날 무렵 사무엘에게 우리에게도 왕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등장한다. 왕을 요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 부당함을 언급했지만, 백성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단한 이후에는 그 제도를 인정한다.

기독교는 불신자들이 말하는 기득권 세력을 비호(庇護) 하는 의미의 보수도 아니며, 하나님의 섭리를 알파와 오메가의 역사적 진보로 이해하여, 발전과 변화를 중심으로 여기는 진보도 아니다. 보수와 진보의 정신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긴장 상태이다.


한국 기독교는 보수가 아니다


한국 기독교의 시작은 보수적이지 않았다. 철통같아 보였던 쇄국의 방패가 뚫리자마자, 밀물처럼 들어온 서구 문물은 새로운 사상이었고, 발전된 세계관이었다. 수천 년 동안 통치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유교에 대한 관념적 도전이었다. 국가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았지만, 철저하게 신분 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조선에,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기독교는 보수가 아니라, 강렬한 진보의 물결로 생각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아래 모든 사람의 평등을 말하면서도 신분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평등을 말하기도 하고, 신분 질서를 옹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주인에게 순종하는 종을 말하지만, 주인도 종에게 선을 베풀라고 강조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이 계속 열거돼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경을 잘 모르는 진보라고 자처하는 집단으로부터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반면, 수구 세력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포기하고 그저 권력층에 기생해서 입맛에 맞게 성경을 날조해서 해석한다.

결론적으로 한국 기독교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며 그 사이에서 절묘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집단도 아니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권력을 구걸해서 특이한 성향의 집단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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