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누구나 들어봤다. 그러나 아는 게 아니다.
일반인들의 이해
공무원들의 인지 수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일반인들은 어떤지 살펴보자.
필자는 업무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은 물론, 가까운 지인 – 교사, 박사, 법조인, 교수 등 - 들과 모임 할 때도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눈다. 다들 관심 있게 들어주고, 필자의 호기심을 높이 평가해 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좀 더 깊이 있는 토론이 진행되거나, 지식을 교환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왜 수많은 매체에서 떠들어 대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지 않을까? 인간은 자주 듣고, 보면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좋아하는 팝송을 천 번쯤 들으면 자연스레 외워질 거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러 가사를 보고 외우지 않는 한, 조금 따라 부를 수 있어도 전체를 기억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다. 언론 등을 통해 수없이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메시지를 수용하지만, 별도로 학습하지 않는 한 올바로 인지하고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가까운 지인 중에는 현직 교사들이 꽤 있다. 이들과 4차 산업혁명 관련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들은 필자의 학생이 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재를 육성해야 할 사명을 가슴 판에 새기고,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아야 할 사람들이지만 관심 두고 꾸준히 학습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곧 목도(目睹)할 4차 산업혁명에 관심 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정보를 발신자 중심으로 무한정 전달하는 언론 보도나, 기술 분야를 세밀하게 설명하는 책들의 출간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국민의 인식 수준을 파악하고 수준에 맞는 정보를 전달하고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게 더 시급하다.
역사를 살펴보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대한민국에 자욱한 안개처럼 깔린 상황인데, 전방을 비추는 헤드라이트에만 의존해서 목적지를 찾아가야만 한다. 길도 잘 보이지 않고,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어서 올바른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라는 버스를 운행하는 운전자는 그동안의 관성에 사로잡혀서 ‘그냥 잘 가고 있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승객들이 이 상황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불안할까?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지, 아니면 정말 불행인지, 승객들은 현재 상황을 잘 모른다. 그리고 ‘운전자가 잘 찾아가겠지?’라는 막연함에다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있다.
현재를 이해하기 힘들 때 우리는 과거를 돌아본다. 즉, 역사를 들춰본다. 그러면, 도움이 될 때가 꽤 있다. 물론, 역사가 모든 것의 해답은 아니다. 다만, 현재라는 표면 아래 차곡차곡 쌓인 퇴적물이기에 현재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에릭 홉스 봄(Eric Hobsbawm)의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 시리즈를 차례대로 읽다 보면, 각 시대를 이해하는 데 전 시대가 도움이 된다.
그리고 앵거스 디턴은 『위대한 탈출』에서
“과거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 더 나은 미래를 탄생시킬 기회가 많이 사라질 것이다.”
라고 경고하면서 역사를 강조한다. 이 말을 지금 현실에 적용하면 과거 산업혁명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4차 산업혁명’을 제목으로 한 책들은 이전 산업혁명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간략하게나마 ‘산업혁명’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위에서 언급한 에릭 홉스 봄이나 페르낭 브르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와 같은 대작 수준으로 산업혁명의 역사를 풀겠다는 말은 아니다.
의미 있는 역사, 그러나 절대적이지는 않다
역사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라는 식의 맹목적인 교훈을 전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역사 자체가 저자의 판단과 감정, 그리고 당시 저자의 환경에 따라 서술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문제없는 정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화’의 주체를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대화의 주체가 권력자, 승자 등이기에 지배계층의 역사라고 비판할 수 있다. 오죽하면, 기존의 역사를 귀족, 혹은 엘리트의 역사라고 생각해서 ‘민중’을 주체로 한 역사책들이 저술되고 있을 정도이다.
역사에 대한 비판은 의외로 문학작품 속에서도 등장한다. 201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의 대표작 『어둔 상점들의 거리』,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Sir Kazuo Ishiguro)의 『파묻힌 거인』 등을 읽다 보면, 인간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시간순서, 즉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많은 오류가 따르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기억의 한계를 지적하는 영화도 있는데, 국내에서 수많은 팬을 거느린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Edward Nolan) 감독의 《메멘토》이다. 이 영화 역시 기억의 한계와 그 정리의 오류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ć)는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에서 미래예측과 관련한 자료를 읽는 과정에서 세 가지의 공통적인 오류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특정 시기에 가장 중요해 보이는 추세가 미래에까지 계속되리라는 믿음’,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는 단일 사건에 대한 예측 실패’,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주역에 대한 과대평가’
등이다.
미래예측을 위해 많은 저자가 과거 사례들을 충분히 검토했을 텐데도 결론적으로 신뢰할만한 미래예측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똑같은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역사의 맹점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 번의 산업혁명을 살펴보려고 한다. 어떤 혁명도 4차 산업혁명과 같지 않겠지만, 그래도 네 번째 산업혁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논어』에 보면,
“삼인행 필유사 택기선자종지 불선자개지(三人行 必有師 擇其善者從之 不善者改之)”
라는 말이 나온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그중에 나의 스승이 있으니 나보다 나은 사람의 좋은 점을 골라서 그 부분을 따르면 된다는 뜻이다. 역사의 경험을 절대화 필요는 없으나 현실에 비춰서 쓸만한 것들을 실용적으로 취사선택(取捨選擇)하면 될 것이다.
작가 : 조연호, 편집 : 안대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