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뀐 세상, 멈춘 교회 : 전략 없는 교회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정보화에 맞서서 기독교는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었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종식되고, 표준이 해체되고, 기독교 진리에 대한 반항이 고개를 들자, 교회는 당황하고 머뭇거리다가 변화의 시기를 놓쳐버렸다.
하나님의 사랑을 설파했던 ‘성전(聖殿)’은 세상의 포교를 단념하고 세상과 응전하는 그들만의‘성전(聖戰)’이 돼버렸고, 집단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전환되는 새로운 시대에 교회는 여전히 수많은 무리 – 성경에 나오는 예수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을 - 를 원했고, 표준화를 바랐다. 그래서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개인을 적대시했다. 2차 산업혁명 시기의 ‘표준’은 이제 계몽이 아니라, 나와 적을 나누는 ‘경계’로 해석됐다.
분산, 평등, 다양성, 개방, 민주주의 등을 외치는 새 시대에 교회는 현실을 외면했고, 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따돌림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성장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재도 교회의 부흥은 성도 증가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교회 주변에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계획이 있으면, 교회를 개보수하거나 새로 건축하는 무리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얼마나 교인이 늘어날지도 모르면서 교회 재정으로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공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공사비는 고스란히 교인들의 몫이다. 목사들은 성도들의 헌금으로 월급을 받아 생활하니 물질적으로 힘겨워하는 대상에서 제외된다. 아울러 교회를 건축해서 이득을 얻는 사람도 목회자들이다. 일반 교인들은 1주일에 1회도 제대로 이용하지 않는 곳이 교회지만, 목회자들은 매일 사용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건축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목회자들은 교인들에 비해 크게 부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내부에서는 자구책으로 각종 성공의 비법을 담은 경영서들이 인용되기 시작했고 돈과 관련한 메시지가 중요해졌다. 1968년에 ‘마태 효과’가 등장해서 새로운 시대를 예측하면서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질 것을 전망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부정적인 예측을 비판하면서 대안을 제시했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론을 그대로 적용한 듯이 교회를 세상의 성공과 연결했다. 특히, IMF 이후 교회는 더 힘써서 성공과 관련된 메시지를 쏟아 낸다.
많은 기도원에서 로또 복권과 같은 이야기들을 많은 목사가 설교했고, 역경에 처한 성도는 그 메시지의 뜻도 모르는 체 ‘아멘’으로 화답했다. 어려운 시기에 교회는 공동체를 강조하고, 나눔을 애써서 실천해야 했는데, 오히려 개인의 성공과 관련한 이야기만 강단에서 진리인 것처럼 설교한 것이다. 그런 무지하고 시대착오적인 행태는 잘못된 신앙적 기틀을 제공하고, 결국 ‘개독교’와 ‘먹사’라는 모멸적인 언어를 탄생하게 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교회는 하나님 것을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그러한 교회를 철저하게 파헤치고 벗겨냈다.
특히, 대중매체는 대형 교회의 비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대중매체의 집중 보도는 교회의 각성을 바라는 측면도 있었을 텐데, 교회는 반성하지 않았다. 이미 울타리 밖은 적지라고 단정한 상황에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와 공격적인 여론은 사탄의 계교이자 말세의 핍박으로 치부했다.
이쯤 되면 초대형 교회가 도미노 넘어가듯 무너질 법도 한데, 교회는 잘 버텼다. 일부 이탈자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내부는 더 결속됐고 규모 유지에 있어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상황은 초대형 교회의 각성 기회가 되기보다는 교회에 충성된 자를 구별했던 시기였다. 신앙의 지적 배경이 없는 교인들의 감성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고, 불쌍해 보이는 담임 목사의 십자군이 돼서 교회와 목사를 지켜주기로 단단히 각오한 듯했다.
그러나 교회 외부의 상황은 달랐다. 원래 자극적인 비판은 대중들에게 잘 먹힌다. 거짓말도 여러 번 들으면 정말처럼 믿게 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사실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부족하고 감정인 대중은 잘 속고 선동에 동요한다. 그저 외부의 여론이 계란 투척, 혹은 피라미들의 버둥거림이라고 생각했었던, 큰 바위이자 거대한 그물이었던 한국 교회는 수많은 계란 투척으로 인해 썩는 냄새가 진동하게 되었고, 촘촘했던 그물은 이제 구멍이 숭숭 뚫려서 사람을 낚는 어부의 도구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그물은 새로운 물고기를 포획할 수 없고, 오히려 잡은 물고기마저 뚫린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고 그러한 물고기를 ‘신천지’와 같은 유사 기독교가 추수 시절 벼 베듯 수확해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3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말하는 투명성과 다양성, 그리고 개인화는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성격과 맞지 않았다. 한국 교회는 철저히 밀실 행정을 원했으며, 획일적인 순종을 강요했다.
혹시 교회에서 토론과 개인적인 발언을 원할 경우 교회의 구태의연한 방침을 순종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계속 부정적인 발언을 계속 유지한다면 누군가가 찾아와 “당신이 원하는 교회를 찾아 떠나시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교회를 더 어렵게 했는데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대중화, 그리고 SNS의 출현은 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것을 포기하게 했다. 목사들이 설교하는 내용은 스마트폰을 통해 수시로 검색되고, 즉시 진위(眞僞)가 가려진다. 그래서일까?
한국 교회는 SNS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지만, 크게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물론, 성도의 연령층 자체가 고령화되었기에 스마트폰과 SNS를 교회에서 원활하게 활용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인지도 모른다(65세 인구가 14%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라고 하는데, 교회는 이미 넘어섰다. 초고령화 기준 21%도 넘었을 것이다. 특히, 지방 교회는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은 교회 내부의 세대 차이를 가져왔고, 이 들을 통합하지 못하고 계속 분리함으로써 더는 연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
3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회는 시대적 변화에 실패했고, 임기응변으로 세대 간 분리를 실행했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세대 간의 깊은 이랑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는 시설과 시스템이 좋은 대형 교회로 청소년과 청년들이 이동하도록 했다.
현재도 아이의 교회 교육 환경을 위해서 교회를 옮기는 가족이 적지 않다. 최근에는 교회에서 부모들이 예배를 드리는 동안 연세가 있는 여성 성도들이 아이들을 대신 돌봐주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과연 이러한 윗세대의 노력이 교회를 부흥시키는 데 얼마 동안이나 작용할 수 있을까? 지금 3040 세대는 그들이 50대가 넘었을 때 다른 3040 세대의 자녀를 돌봐 줄 거로 생각한다면 큰 오판이다. 당장은 중소규모 교회의 청년부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 대형 교회는 그렇지 않고, 작은 교회들은 점점 사라지고 큰 교회만 한동안 현재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들이 많다고 해서 혁신과 개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시인 사무엘 울맨은 《청춘》이라는 시에서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했다. 아무리 청년이 많아도 교회는 쉽게 젊어지기 힘들다.
현재 교회에서 청년들의 역할은 장년층을 위한 찬양단 역할, 장년들의 후원을 받아 비전트립(vision trip)을 떠나거나 교회 행사의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비전을 품고 한국 교회의 주역으로 나서야 할 청년들은 교회의 메인행사를 위한 오프닝 담당자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청년들의 신앙적 열정도 크지 않다. 10년 넘게 청년 사역을 하면서 느낀 점은 한 해가 다르게 기독교 청년들의 삶 속에서 세상과의 갈등이 줄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
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보수적인 교회에서 주일 날 군것질을 하는 것은 안식일을 위배하는 것이라 하여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교회 내에서는 절대로 전자 기타나 드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장광설을 퍼붓던 교역자들이 몇 년 만에 마음을 바꿨다. 간식을 구매하는 일도 스스럼없이 진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신앙과 음주(흡연)’, ‘신앙과 돈’, ‘신앙과 성공’, ‘신앙과 섹스’ 등 다양한 문제가 과거에는 20대를 갓 넘은 청년들의 고민이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고민이 아니라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예로 2000년대 후반에 지도했던 청년들한테는 “술 먹는 사람?”이라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술 안 먹는 사람?”이라고 질문해야 손드는 청년들이 더 적었다.
청년들의 변화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가장 큰 원인으로 교회가 청년들에게 비전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대통령들이 감옥에 가고, 많은 기독인 유명인들이 비판받는 가운데 청년들이 의지할 멘토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고지론에 혈안 돼 앞만 보고 달린 교회는 예전처럼 쉽게 취업하지 못하는 청년 세대들을 이해해 주지도 못했다.
아무리 기도해줘도 취업, 결혼, 출산 등에 있어서 사회의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은 개혁의 상징이 아니라 정체성조차도 확립하기 힘든 세대로 계속 돌봐줘야 하는 응석받이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