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이 사라진 교회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가장 아날로그적인 형태를 고수했던 교회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외부와 담쌓고 지내면서 홀로 고독을 씹던 모습에서 탈피해서 웬만한 것들은 수용하려고 했다. ‘명품’과 ‘웰빙’이 뜨자, ‘명품교회’, ‘웰빙교회’를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이 등장했고 강단에서 성경 말씀을 전달하기보다는 경영기법에 대한 설교 빈도수도 잦아졌다.
세상의 것들이 여과 없이 교회에 적용되자, 교회에 다니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겪어야 할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의 갈등도 줄어들었다.
찬물과 더운물을 섞으면 사용하기 좋은 물이 될 수도 있지만,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이 되기도 한다. 세상과 완벽한 구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개방도 아닌 교회는 미지근한 형태가 됐다.
1990년대는 한국 교회의 격변기여야만 했다. 서구는 ‘1968년 혁명’이 있어서 사회적인 변혁이 이루어졌다. 실패한 혁명이라고는 하지만 그 여파가 적지 않았다. 우연히도 3차 산업혁명 시대와 그 시기가 겹친다. 조직의 규모를 바탕으로 성장만을 추구했던 전 시대와 다르게 이제는 개인의 자유가 중요해지고, 정주(井疇)가 아니라 노마드를 추구했다.
인터넷의 개발과 일반적인 보급은‘마태 효과’라는 부정적인 예언을 나았고, 그 예언은 21세기에 실현됐다. 가진 자는 기업인데 더 커졌고, 가진 것마저 빼앗긴 자는 교회였다. 유럽에서 기독교 인구는 과거 종교전쟁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한국은 1980년대까지 국가 주도의 고속 성장을 달리다가 1987년에 정치적 시스템의 변화를 경험한다. 정치적 변화는 가져왔지만, 시스템 꼭대기 권력의 모습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한흥수 교수의 『한국 정치 동태론』에서는 각 정권을 ‘권위주의’ 형태로 설명한다. 1공화국 이승만 정권을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설명하고, 문민정부를 ‘문민 독선적 권위주의’라고 설명한다. 물론, 변증법적인 정반합으로 한국 정치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지만, ‘권위주의’라는 공통분모를 떼어 내지는 못했다.
경제 분야에서도 변화가 있었는데 서구와 비교하면, 산업화가 늦었지만, ‘빨리빨리’라는 구호를 엔진으로 삼아서 따라잡기 시작한다. 그래서 한국은 2차 산업혁명의 조직화, 중앙집중화와 3차 산업혁명의 개인화, 분산화가 중첩된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의 후유증으로 고속 성장과 함께 이뤄진 사회변화는 사회적 아노미 현상을 낳았다.
사회·문화적으로는 인터넷이 보급되고 PC가 필수품이 됐는데, 당시 중장년층은 본인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고수했고, 청소년층은 디지털 문명을 태어날 때부터 경험하면서 살게 되는 ‘디지털 네이티브’가 됐다. PC와 인터넷을 활용한 청소년들의 가상 공동체는 교회의 누룩을 거부하고 계속 진화하는 게임의 향연으로 빠져들게 했다.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함께 나눌 수 있는 문화거리나 공통관심사가 있어야 했는데, 3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그런 매개물이 이전 세대보다 줄어들었다. 에스컬레이터 시대의 종식으로 신세대가 구세대를 따라야 할 표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변화 속에서 교회도 변화했다. 어느 시점에 예배당 한가운데 빔프로젝터와 대형 스크린이 등장했고, 전자 음향 기기가 예배당에 전자음을 가득 채웠다. 이게 다였다. 그러다 보니, 나날이 진화하는 디지털 기술의 경험과 게임 등을 통한 가상현실의 발전은 이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상 게임 공동체의 리더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시켰다.
한국 교회는 이미 거대한 공룡이 됐기 때문에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없다. 개미와 같은 작은 생물체는 지금도 지구의 역사를 함께 하고 있지만, 공룡은 그 진위를 따져야 하는 수준으로 사라졌다. 조직을 보더라도 기업이 클수록 신속한 결정과 거리가 멀다. 오너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제안한 안건이나 건의 사항은 공기에 산화돼 녹슨 쇠붙이처럼 돼버린다.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 하버드 대학의 교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가 말한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은 기존 기업에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에 적극적으로 대입해야 할 개념이다. 기존 기업은 합리적 선택과 존속적 혁신을 통해 현상 유지(Status quo)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파괴적 혁신을 추구하는 보통 작은 기업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현상을 타파하려 한다. 이러한 성향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룰’을 따르면, 기존 기업들을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타트업들한테 파괴적 혁신은 살기 위한 최고의 몸부림인 셈이다.
공룡 교회는 파괴적 혁신을 생각하거나 실행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리고 일반 대기업처럼 존속적 혁신 수준에도 이르지 못했다. 생사기로에 놓인 스타트업이 “파괴적 혁신”의 선봉이 됐고, 지난 시대까지 경제를 이끌었던 기업들은 “존속적 혁신”을 추구하고 교회는 어떤 혁신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점점 “꼰대”가 돼가고 있다.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않은 지도층의 구태의연함과 아집(我執)은 교회 혁신에 큰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이가 들면 적극적인 사고나 새로운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결과물이 꽤 있다.
현재 세계적인 흐름을 주도하는 기업의 CEO들은 나이가 많지 않다. 일선에서 물러난 빌 게이츠와 애플을 이끌었던 스티브 잡스는 1955년생이고, 현재 최고 부자로 등극한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1964년생이다. 구글의 창업자 둘은 모두 1973년생이고, 아이언 맨의 모델이었던 일론 머스크도 1971년생이다. 마지막으로 페이스북의 대표 마크 주커버그는 1984년생이다.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작고한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를 제외하면 60대가 아무도 없다.
즉, 새로운 분야를 스스로 학습하는데 그들의 뇌는 잘 돌아간다는 말이다. 물론 젊음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단, 일반적으로 진취적인 사고와 발상이 젊음에서 나온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 지도층은 어떠한가? 그들의 식견은 전근대적인 과거(반공, 유교, 수구 등)에 머물러 있으며, 새로운 것에 관심도 없어서 스스로 학습하지 않으며, 교인들에게 학습 기회를 제공해 주지도 않는다. 상대적으로 젊은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새로운 걸 배우는 순간,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힘을 갖는 순간 현재 자신의 위치가 위험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잠시 막을 수 있을 뿐 영원히 멈추게 할 수는 없다. 1억 년 전 거대한 공룡도 변화의 태풍 속에서는 그저 허먼 멜빌의 『백경(白鯨)』에 등장하는 바닷속의 ‘모비딕’일 뿐이었다.
정보화 시대에 교회는 무능했다.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신적 가이드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휴대폰에서 스마트폰에서 넘어가는 시점에도 대예배를 드리는 본당의 한가운데에는 여전히 “경건한 예배를 위해서 핸드폰을 꺼 주십시오.”라는 정중하고 시대착오적인 권유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 중에는 여전히 벨 소리가 울린다.
대부분 예배를 방해하는 경건치 못한 벨 소리는 스마트폰이 아니고, 정면에 크게 써 놓은 권유를 무시하기라도 하듯이 2G폰에서 울리는 소리이다. 연령대는 60대 이상, 그들은 교회를 수십 년 다녔고, 직책은 권사, 혹은 장로이다. 예배의 경건을 가장 중요하게 따지는 교회의 어른들이다. 정확한 정보보다는 과거의 관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변화에 민감하지 못한 세대다. 그리고 이들은 현재 한국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헌금을 가장 많이 내는 교인들이다).
3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회는 철저히 실패했다. 교인들의 숫자도 수평적 이동은 있었을망정, 수직적 이동은 없었다.
물론, 20세기 말 교회는 변화를 시도하긴 한다. 교회는 세련됨을 추구한다. 교회의 모습이 예전의 철탑에서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세련돼 보이는 구조물로 변화했다. 교회마다 다양한 문화공간을 만들고, 카페를 운영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넣어서 십자가만 빼버리면, 일반건물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형태가 된다.
세련된 교회의 본질은 교회 건물의 세련됨이었다. 근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영어교육을 위해 영어 예배를 신설하기도 했는데, 국어로 전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을 굳이 영어로 전달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영어가 중요해지는 사회현상만 고려해서 더 쉽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성경 말씀을 포기한 거라고 한다면, 필자만의 억측일까?
현재도 많은 교회에서 성경을 교재로 한 영어학습 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아이들의 영어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더 좋은 교재로 교육하면 되는데, 왜 국어로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영어로 가르칠까? 도대체 교회가 전해야 하는 진리와 본질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전제했다. 즉, 합리적인 인간을 경제 주체로 가정한다. 경제에서 합리적이라는 말은 이익과 관련 있다. 기존 기업들은 이익이 되는 일을 추구했지, 보이지 않는 신앙은 신뢰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그대로 믿지도 않았다.
결론적으로 ‘신’ 대신 ‘경제’ 다른 말로 ‘자본’이 신이 됐다. 그래서 기업은 계속 돈을 벌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만 했다. 궁극적으로 신의 뜻을 찾아야 하는 신앙 공동체로서 세상처럼 이익만을 추구해서는 안 됐다. 지금도 돈과 관련한 뉴스가 나오면, “어떻게 목사가? 어찌 교회가?”라고 한탄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나라 말이지만, 이해하기 난해하다. 모순이기 때문이다. 믿음 자체가 실제로 보이는 사물이 아닌데, 저자는 ‘실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증거’라고 한다. 두 단어 모두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류(類)가 아니다.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다시 믿음으로 돌아가 믿어야 한다.
2000년 전 실제로 예수를 보고, 그의 기적을 체험했던 제자나 당시 사람들은 믿음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 교회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여기며 그 믿음을 실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도 어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