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한국 교회(19)

승자독식을 지지한 교회

by 조작가Join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


교회는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를 어떤 version으로 맞이할 것인가? 3차 산업혁명 시대에 겪은 좌절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고, 변두리로 더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인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적극적으로 세상으로 나가 선포하고 선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리더 십이 있어야만 그 역할 수행을 할 수 있다. 파쇼적인 권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꼴통보수’라는 욕을 먹고 있다고 해도,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회개함과 동시에 새로운 기독 정신을 선언해야 한다. 기독교 정신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거부해야 한다. 기독교 정신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대안 정신이다. 그런데도 광화문에 모여서 현 정권을 좌파라고 비난하고, 과오가 있는 전직 대통령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기독교 정신이 아니다. 더욱이 코로나가 창궐한 세상에 세상의 상식을 거부하는 고등 종교는 세상에 없다. 기독교의 탈을 쓴 무속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정신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의 질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보수적인 느낌이 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를 확대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공유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진보적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구절처럼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여호수아, 열왕기 등 다양한 곳에서 관련한 구절이 나온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특정한 정파를 지지하거나 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보면, 기독교는 보수적이다. 기독교를 믿었던 대통령 3명이 모두 보수당 출신이다. 물론, DJ와 같이 가톨릭 신자이면서 정권 교체에 성공한 정치인도 있지만, 개신교를 믿는 대통령(이승만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등) 모두 보수당에서 출마해서 당선됐다.


한국 교회가 보수적이라는 말을 듣는 다른 이유로는 가부장적인 권위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오직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있어야지 인간의 권위가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교회 내에서 과도한 자유주의를 외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불완전성에 호소하면서 형성된다. 창세기에 보면 태초의 인간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창조물이었지만, 타락 이후의 아담은 불완전하다. 이후 인간은 근친살해, 근친상간, 간음, 도둑질, 살인 등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죄(도덕적 범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어서 범죄(crime)를 포함한 죄(Sin)의 개념이다)를 저지르면서 살아간다. 교회는 그런 불완전한 인간들이 완성자인 예수의 은총을 소원하면서 세운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절대적 합리성을 전제로 한 자유에 대한 외침과 민주주의는 우상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교회 내의 선한 민주주의는 존재해야 한다. ‘협력해서 선’을 이루라는 말씀은 부족한 인간들의 노력에 하나님의 은총이 더해져서 가능한 것이니 교인들의 진중한 토의와 토론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은 항상 ‘신독(愼獨)’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어느새 교회와 성도들을 유혹해서 한쪽으로 치우치게 만들려 할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종교?


교회와 산업혁명을 논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산업혁명은 철저히 세속적이면서 경제적인 분야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독교는 영적인 것, 무형의 것이어서 세속적인 변화의 잣대로 잰다는 게 과거에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을 것이고, 현재는 교회의 세속화가 충분히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교회를 평가한다고 하면 여전히 반론이 만만치 않다.


막스 베버는 출중한 학자였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다. 특히,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윤리』는 미국의 자본주의를 개신교 윤리와 연결해서 저술한 고전이다. 당시 사회를 종교라는 틀로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제시한 탁월한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베버는 미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청교도 윤리와 연결하면서 종교 윤리를 세속화시켰다. 물론, 미국 자본주의 정신의 근간이 된 청교도 윤리 자체에 대한 시비(是非)는 따지지 않는다.

베버가 대단한 이유는 1차 산업혁명을 거쳐서 근대화의 파고 속에서 유럽에서 기독교가 거의 몰살당하고 있었던 시점에 다시 종교 윤리 가치를 현대에 적용한 부분이다. 실제로 1904년 – 1905년에 걸쳐 연재하던 걸 1920년에 책으로 출간한 것인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다.

당시 유럽은 혁명의 폭풍을(에리 홉스 봄의 『혁명의 시대』를 참고하자) 지나서 종교에 대한 신뢰가 이미 바닥으로 추락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대 화석으로나 존재할 종교, 즉 사상을 꺼내서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삼은 것이다. 그는 미국의 상황만 종교로 분석하지 않고 이후 대작 『종교 사회학 대전집』을 출간한다. 시기적으로 볼 때 베버는 카를 마르크스의 후세대 학자이다. 즉, 유물사관을 바탕으로 한 마르크스와 정반대 되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세계를 독해하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공한 것이다.

베버는 미국 성장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바로 청교도 윤리에 있다고 파악했다. 미국 기독교에 대해서는 베버 이전에 토크빌도 『미국 민주주의』에서 언급한다. 그러나 토크빌이 살았던 시대는 그가 살았던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에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자욱했을 때였고, 베버가 살고 있었던 시대는 유럽에서 종교는 퇴물로 버려졌던 시대였다는 점이 다르다.

당시 유럽은 이미, 콩트의 사회발전 법칙에 따라 신화의 시대에서 철학의 시대로 그리고 과학 기술의 시대를 경 험하고 있었다. 실제로 19세기에 등장한 다윈의 진화론은 이후 막강한 위력을 행사한다. 지금도 진화론은 그 위세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현재는 과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과학 기술은 인간의 열정과 어울려서 1차 산업혁명을 태동하기도 했지만, 역시 인간의 탐욕과 맞물려서 파생한 부정적인 여파로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동시에 세계는 평등이라는 기치로 공산주의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번질 만큼‘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을 심화시켰다.

한편 미국은 조금 달랐는데,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목숨 걸고 신대륙으로 이주했던 퓨리턴들은 검소함과 근면을 체질화하면서 새로운 대륙을 개발했다. 물론,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개척정신으로 미화한 건 어쩔 수 없는 자기 합리화였다. 당시, 부(富)는 곧 근면함과 검소함의 결과로 인식됐고, 따라서 가난함은 게으른 자의 당연한 결과물이자 대가였다.

언뜻 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현상을 단편적으로 이해하면 틀리지 않은 말이다. 성실함은 좋은 것이고, 게으름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건 미취학 아동도 다 아는 말이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런가? 쉽게 생각해 보자.


하루 24시간 내내 일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 그렇게 일하더라도 일정 기간이다. 그러나 시간당 임금이 다르다. 더 쉽게 생각해서 이재용 부회장 1시간 임금과 편의점 알바생 임금이 같은가? 축구의 신이라고 불리는 리오넬 메시와 같은 축구 선수와 그와 함께 뛰고 있는 다른 10명의 몸값 역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차이의 근거는 ‘노동의 질’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편의점 알바생 보다 훨씬 중요하고 양질의 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메시가 다른 10명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틀렸다. 아무리 양질(良質)의 업무를 한다고 하더라도 알바생과 비교한 이재용 부회장의 노동의 대가는 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메시가 아무리 축구를 잘하더라도 현재 다른 선수와의 연봉 차이는 부당한 수준이다. 로퍼트 프랭크(Robert H. Frank)의『승자 독식 사회』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승자독식’이 만연한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승자독식’에 대한 비판이 휴머니즘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이라고 한다면,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할까?


성경은 구제(救濟)를 말하고, 약자를 보호하라고 구약에서부터 전하고 있다. 물론, 아무리 도와줘도 어쩔 수 없는 부류가 있다. 그들에게는 권고해서 개선할 수 있도록 주의 줘야 하는 게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조차도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건 아니다. 최소한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하지만, 미국 청교도주의에서 근면은 그렇게 해석되지 않았다.

부의 축적이 축복이 된 이상 가난은 죄가 돼 버린다. 그리고 죄인에 대한 보호는 논리적으로 옳지 않다. 약자가 죄인이 될 수 있는 논리가 바로 성경 해석을 통해서 등장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해석은 가진 자들의 논리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을 언급하면서 시작점부터 다른 현실을 비판한다.

결론적으로 산업혁명은 산업화를 약진시켰으나 그 결과로 발생한 부의 분배는 철저히 실패했다. 아울러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몰락을 그리고 새로운 기독교의 국가가 된 미국에서는 부자들을 옹호해줬다. 십일조 재벌로 유명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는 많은 교회에서 목사들의 설교에 많이 인용되는데, 실제로 그가 독점을 위해 저지른 만행은 그가 교회에 헌금으로 낸 십일조로도 상쇄하기에 부족할 것이다. 한 주머니에는 십일조를 소중하게 넣었던 록펠러는 현재 강도 귀족(Robber Barons)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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