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와! 와!(개구리, 인형, 여와)”
『개구리』상(上)편 모옌(Guan Moye)(2012년 수상자)
제목이 ‘개구리’다. 중국인 작가의 작품이니 원제는 ‘와(蛙))(개구리 와)’이다. 역자는 한자를 그대로 ‘개구리’로 옮겼다. 왜 그랬을까? 역자의 판단이겠지만, 제목은 그대로 ‘와’로 뒀어야 했다.
‘와’는 발음되는 ‘음(音)’으로 중의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개구리는 다산(多産)을 상징한다고 한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중국 공산당의‘계획생육’을 비판하고 있다. 물론, 인류의 존망과 관련한 논리로 포장된 중국 공산당의 정책을 설명하고 있지만.
계획생육은 국가의 대사야. 인구를 통제하지 못하면 식량도 옷도 부족하고,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가 없어. 사람들의 수준을 향상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가 없어. 이 한목숨, 나라의 계획생육 사업을 위해 바칠 수 있어. 『본문』 중
실제로 중국인이 아닌 이상, 혹은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는 한 산아제한정책에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산을 상징하는 ‘와’의 다른 의미는 역설적으로 무책임한 정자(精子) 살포다. 양서류만의 번식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작가는 인간도 개구리와 다르지 않음을 묘사한다. 특히,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지배적인 과거와 현재의 중국을 그대로 가져와서 비판한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 애쓰는 인물들의 과거로부터
1980년부터 중국 정부는 도시에서 ‘독생자녀(獨生子女)’ 정책을 실시했다. 부부가 평생 아이 한 명만 낳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광대한 농촌에서 한 쌍의 부부가 남자아이를 낳을 경우 더 이상 낳지 못하며, 만약 첫째가 딸일 경우 8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한 명을 낳을 수 있도록 했다. 『본문』 중
자녀를 충분히 낳기 위해서 정부(情婦)를 두는 현재까지, 수컷들의 유전자 보존과 증식을 위한 노력을 개구리의 무분별한 살포에 비유한다.
좋은 말로 하면 ‘대리모 회사’고, 좀 뭣한 표현을 쓰면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임신해 줄 여자를 공급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아저씨의 그것, 그 ‘조그만 올챙이’만 꺼내서 여자들 자궁에 주입하는 거예요. 때가 되면 아기만 데려가면 돼요. 가격도 싸요. 남자아이는 5만 위안, 여자아이는 3만 위안…….
『본문』 중
핵심 인물은 당연히 서술자의 고모다. 수천 명의 아이를 받기도 하고, 반대로 수천 명의 아이를 유산시키기도 한다. 생명을 죽이는 게 좋을 리 없겠지만, 그녀는 신념으로 무장된 여인이다. 그 어떤 것도 당(공산당)을 우선할 수 없으며,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계획생육은 국가의 대사야. 인구를 통제하지 못하면 식량도 옷도 부족하고,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가 없어. 사람들의 수준을 향상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가 없어. 이 한목숨, 나라의 계획생육 사업을 위해 바칠 수 있어. 『본문』 중
신앙과 신념은 종종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진다.
철저한 유물론자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설사 정말 지옥이 있다 해도 난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습니까! 『본문』 중
초대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천국이 이 세상보다 더 소중했기에. 아울러 신념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 사상은 수천만 명을 죽였음 – 중국은 대약진 시대에 2천만 명이 사망했고, 문화혁명 때도 2천만 명이 사망했다. 구소련 스탈린 치하에서도 수천만 명이 사망했음 - 에도 과오(過誤)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 개조는 이미 실패로 밝혀졌지만, 그 만행을 저지른 자들은 아무도 사죄하지 않았다.
다행히 작가는 주인공의 변화를 보여준다. 당연하게 여겼던 충성이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행동으로, 그러다가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변화를 보여준다.
스쯔는 마치 암송하듯 말했어요. 왜 ‘개구리 와(蛙)’하고 ‘인형 와(娃)’하고 발음이 같은지 알아요? 왜 엄마 배 속에서 아기가 처음 나왔을 때 우는 소리하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비슷한지 알아요? 왜 우리 둥베이 향 점토인형 가운데 많은 수가 개구리 한 마리를 안고 있는지 아냐고요! 『본문』 중
영화 《사바하》에서는 자신의 불사(不死)를 위해서 어린 생명 죽이는 걸 당연시 하는 기인(奇人)이 등장한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살인 대리인들은 심한 죄책감과 망상에 시달린다. 어린 시절부터 세뇌당하고 살인을 위한 교육을 받았지만, 생명을 죽이는 게 쉽게 익숙해질리 없다.
주인공은 수많은 태아를 낙태해야만 했다. 그 죄책감은 현장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삶의 깊은 심연으로 등장한다. 아니면, 시대가 변했기에 자연스럽게 사상이 변한 것일까?
고모가 유산시킨 아이들이 고모부의 손을 통해 하나씩 재탄생하고 있었습니다. 고모는 이런 식으로 마음속의 죄책감을 덜어 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모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고모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 해도 누군가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본문』 중
스스로 탓할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고모는 자책한다. 작가는 조직의 명령으로 실행했다 하더라도 완벽한 면죄부가 부여되는 건 아니라는 암시를 보여준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그런 점이라는 걸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점토 인형에 대한 고모의 마음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모든 아이는 저마다 유일한 존재이며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손에 묻힌 피를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걸까요? 죄의식에 얽매인 영혼을 벗어던질 방법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본문』 중
생명을 빼앗은 피 묻은 손은 영원히 씻기지 않는다. 이미, 쏜 살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화살을 맞고 애꿎은 민간인이 죽었을 때 죄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도 힘들다. 아무리 인형으로 죽은 태아를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인형은 원래 생명이 없으니.
왜 인류의 시조를 여와(女娲)라고 할까요? 발음이 같은 걸 보면 인류의 시조가 바로 커다란 암컷 개구리였을 거예요. 인류가 개구리에서 진화했을 거라고요. 유인원에서 진화했다고 말하는 건 완전히 잘못된…….
『본문』 중
잠정적으로 개구리라는 뜻의 ‘와’라고 했어요. 물론 여와의 ‘와(娲)’를 쓸 수도 있어요. 여와가 사람을 만들었고, 개구리 와(蛙) 역시 다산의 상징이잖아요. 『본문』 중
개구리는 부모를 모른다. 수컷이 배설한 수많은 정자에 암컷의 난자가 결합하고 수정돼 올챙이로 태어난다. 그러니 이런 아이들은 부모를 알 도리가 없다. 특히, 약육강식의 자연 세계에서 부모 개구리는 쉽게 잡아 먹히니 더 그렇다. 개구리의 다산(多産)이유는 유전자를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아무리 다산을 원해도 개구리처럼 낳을 수 없다. 아울러 열 달은 여자의 뱃속에 머물러있어야 하기에 아이도 부모도 쉽게 정을 뗄 수 없다. 부모를 모르고 자라더라도 출생의 비밀을 알면, 당연히 친부모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성경 구약 창세기에는 여성의 해산을 죄(罪)로 인한 벌(罰)로 설명한다. 해산의 ‘고통’이 이러한 성서적 설명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역으로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은 해산의 ‘고통’에서 ‘희망’, ‘기쁨’으로 승화한다. 성경적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해산은 죽을 만큼의 고통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겪고 새로운 생명을 품에 안는 순간 고통은 잊히고, 기쁨이 찾아온다.
어머니가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어요. 여자는 왜 태어나는지 알아? 결국 아이를 낳기 위해 태어나는 거야. 여자의 위치도 아이를 낳음으로써 생기는 거고, 여자의 존엄 역시 아이를 낳아야 생기는 거다. 여자의 행복이나 영예도 마찬가지란다. 여자가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건 가장 큰 고통이야. 여자란 모름지기 아이를 낳아야 완전한 여자지. 『본문』 중
오해는 말자. 단지, 생명을 나을 수 있는 위대함에 대해서 ‘여와’를 사용한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