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한국 교회(22)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회, 그리고 우연의 등장

by 조작가Join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회


필자는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서 이미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첫 번째 책은 『4차 산업혁명과 자치분권 시대』로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논의되고 있었던 지방분권과 4차 산업혁명을 연계한 것으로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리얼하게 정리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의 4차 산업혁명 대비 준비는 낙제점이라는 것이었고, 지방은 그 수준이 더 심각함을 기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차 산업혁명과 지방분권은 그 조합이 좋다고 주장했고(단, 그 준비가 제대로 준비되었을 경우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술’(4차 산업혁명)을 담기 위해서는 ‘새로운 부대’ (지방분권 제도)가 필요함을 피력했다.


첫 번째 책 서두에서는 주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인지 수준의 문제점(낮음)을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정리했는데, 현재 상황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18년에도 많은 출간물과 언론에서 ‘4차 산업혁명’과 ‘4차 산업’을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를 지속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2019년에도 지방 방송국과 지면 등에 여전히 ‘4차 산업’이라는 표현이 버젓이 등장하고, 간혹 국가 기관에서도 ‘4차 산업혁명’과 ‘4차 산업’을 구분하지 못하고 표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교회 내에서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 스마트 시티와 관련한 자료를 검색했다. 스마트 시티 지수가 있어서 순위를 매기는데 1위가 코펜하겐이었다. ‘휘게’의 나라 덴마크의 수도가 1위인 것이다. 조금 의아한 마음에 왜 코펜하겐일까?라는 고민을 했는데, 결론은 ‘사용자 수준이 중요하다.’였다.


아무리 좋은 첨단 시스템을 도입해도 사용자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하지 못하면, 스마트폰을 2G 폰으로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참고로 서울이 21위였다. ICT 기술만 놓고 따지면, 최고 순위에 있어야 할 서울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다. 아시아의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유럽의 국가가 5위 권 안에 있었고, 미국의 주요 도시가 그 아래를 차지했다.


4차 산업혁명 이해와 관련한 문제는 교회 현실에 그대로 적용된다. 현재 다니는 교회에 3년 넘게 출석하고 있는데 단 한 번도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설교나 메시지를 들은 적이 없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목회자의 관심 분야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다. 비단, 필자가 속한 교회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문화 평론가 장로님과의 대화 기회가 있었는데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는 반(反)의 관계로 생각하고 계셨다. 단편적으로 보면, 과학 기술과 종교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핵심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사용 주체가 공통적으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생각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을까? 아인슈타인은 “종교 없는 과학이나 과학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물론, 그가 믿는 신은 개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는 지적 설계자를 인정했다. 어쨌든 주사위 놀이하는 신을 받아들이기는 걸 거부했으니 말이다.


종교계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잘 대비하고 있지 못하고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는 속세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교회 자체가 속세 주의에 물들어 있는 현실 속에서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수많은 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공공 기관으로 자리 매긴 한 지 오래됐음에도 교회는 게으름 피운다. 실력이 충분히 있는데 교회는 그 실력을 썩히고 있다. 수많은 인재, 자원, 하드웨어, 세계적인 네트워크 등이 있는데 왜 교회는 이 모든 자원을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활용하지 않고 있다.


두 번째 책은 『대구의 플라뇌르(Flaneur) 대·프리·카를 말하다』(이하 ‘대프리카’)로 부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대구’이다. 전작이 국가와 관련한 내용이었다면, ‘대프리카’는 대구에서 2년 넘게 거주하면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대구광역시 4차 산업혁명 대비의 현재와 앞으로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더 개방적이어야 함을 주장했으며, 노령인구에 대한 기본소득을 파격적으로 제안했다.


물론, 대구의 특성에 맞춰 쓴 것이어서 보편적 제안은 아닐 수도 있다. 청년 인구가 늘지 않는 가운데, 고령 사회로 진입한 대구의 현실 속에서 차라리 노인층을 대상으로 학습 기회를 늘리고 기본소득을 제공하자는 게 요지다. 국가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시니어’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다양한 일거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수요자의 생각이 아닌 공급자의 판단으로 지원하는 현실이다 보니, 현실적인 괴리가 있다.

지역 교회의 현실도 별로 다르지 않다. 교인의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지만, 청년은 유입되지 않는다. 10년이 더 흐른 후에는 더 고령화될 것이고, 교회는 더 노화될 것이다.

현재 교회의 평균 연령은 사회적인 연령대와 비교하면 더 늙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현재 연세가 있는 교인들은 국가 경제성장기의 혜택을 받아 연금 생활하고, 자가를 소유해서 살고 있어서 적정 수준의 경제적 소득만 있으면 생활하고 헌금 내는 데 무리가 없는 세대들이다.


하지만 새롭게 고령화에 편승하는 교인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청년 실업은 현재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계속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선전했지만, OECD 국가 중 가장 좋지 못한 수치이며, 앞으로도 긍정적으로 개선되기 힘들 것이다. 사실, 새로운 혁명 시대에 자동화는 더 급격하게 이뤄질 텐데, 노동인구를 추가로 증원하는 기업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도 말 많고, 생각 많은 인간을 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청년들도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취업에 관련한 눈이 높아지니, 적당한 일자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원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3D 직종에 관심 있는 청년은 거의 없다. 종종 언론에서 환경미화원 등을 뽑는 데 대학원까지 수료한 지원자가 있다고 하면서 취업난을 언급하지만 실제로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거나 육체적으로 힘든 직업군에 청년들이 지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특히, 이번 '코로나 19' 이후 기업의 구조조정과 함께 자동화와 인공 지능화가 가속화될 전망이니 취업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다 보니, 3포에서 5포로 그리고 N포 세대로 가는 청년들이 즐비하고 이런 현실은 곧 교회의 미래이다. 대부분 교회에서 청년들이 감소하고 있고, 성비도 극단적이다. 여성 청년이 남성 청년들과 비교해서 월등히 많다. 물론, 이와 같은 구성은 장년층에 올라가서도 마찬가지다. 성비의 차이는 결국, 같은 신앙을 배경으로 한 남녀가 가정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같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다고 할 때, 긍정적인 경우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교회에 잘 다니는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주부는 교회보다 식사를 챙겨야 하는 게 당연하고, 최근에는 주말에 더 바쁜 직업군에서 종사하는 교인들도 많아지면서, 결혼 후에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인 경우 교회 생활보다 사회생활에 더 힘쓸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같은 신앙 공동체로 시작하지 못하는 가정은 교회에서 이탈하거나 거리를 더 둘 수밖에 없는데, 이와 같은 결과는 교회가 젊은 세대 가정 수가 줄어드는 이유가 된다.


우연의 등장


사회의 현실, 국가의 현실, 세계의 현실은 교회의 현실이다. 일자리가 사라지면, 미취업 성도들이 늘어나고, 헌금에 부담을 느끼는 교인들은 당연히 교회 다니기를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그리고 과거 기복신앙이 현실적으로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첨단과학의 발전을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교인들은 현세가 아닌, 저세상에 대해 강조하는 교회의 ‘믿음’을 망상(妄想)이라고 여길 가능성도 더 커진다.

『이기적 유전자』로 일약 생물학계 스타로 뜬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을 비롯해서 다양한 모임과 저술을 통해 ‘신’의 존재를 망상으로 치부한다. 그의 비판 대상은 보편적인 교회가 아니라 극단적인 보수 교단에 해당하는 내용이어서 일반적인 비판이라고 할 수 없지만, 신에 대한 부정은 교단과 상관없는 공통적인 비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과학 기술 발달로 인해 더 거세질 전망이다. 역설적으로 다행인 건 한국 교회 교인들은 지적인 훈련을 별로 하지 않고 책도 별로 읽지 않아서 문해력이 상당히 떨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비판적 메시지를 책이나 여타 자료를 통해서 접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웃픈’ 상황이다.


책을 한 권 같이 읽자고 하면, 겁부터 내는 게 현재 교회 교인들이다(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데도 함께 독서 토론을 하자고 하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인상 좋은 미소만 짓는다).

과거 아인슈타인은 닐스 보어와 유명한 토론을 했는데, 기본적으로 아인슈타인은 ‘확정성의 원리’를 믿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종교인이었다. 닐스 보어는 ‘불확정성 원리’를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닐스 보어가 승자가 됐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고, 닐스 보어는 “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게.”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확정성 원리와 불확정성 원리를 결합하고 싶어 했던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노력에 대해서 주변 과학자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봤다고 한다.


뉴턴의 과학 질서를 비판적으로 넘어선 아인슈타인이었지만, 질서가 잘 구축된 세계를 전제하고 자신의 이론을 증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도 새로운 과학적 발견으로 무너졌다. 불확정성이라고 하면, 쉽게 확률을 떠올리면 된다. 확률은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는 걸 말한다. 인과관계는 모든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그 기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결국 제1 원인이 등장하는데 바로 신이다. 다시 말해서 확률이라고 한다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원인은 존재하지 않고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우연’이 원인이고 근거가 된다. 우주가 만들어진 것도 우연이며, 인류가 탄생한 것도 우연의 산물이라는 의미다. 폴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는 광활한 우주에 인류와 같은 생명체가 우리밖에 없다는 사고를 부정한다. 한국의 많은 국민이 본 ‘인터스텔라’에서도 새로운 차원을 말하고 있는데, 킵 손의 『인터스텔라 과학』에서는 영화 속에서의 차원을 5차원으로 상정했다고 한다. 『우연의 설계』에서는 우연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과 과학에서의 활용되는 우연의 개념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우연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질서라고 할 만한 법칙들이 존재함을 언급하기도 한다. 아니면, 저자 역시 우연도 또 하나의 질서에 묶어서 설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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