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한국 교회(23)

빅데이터와 교회

by 조작가Join

빅데이터와 교회


'우연'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보이지 않는 키워드이다. 빅데이터는 인과관계를 따지는 자료가 아니다. 상관관계만 분석한다. 물론, 상관관계도 엄격히 따지면 인과관계의 곁가지로 여길 수도 있지만, 해석은 그렇지 않다. 원인과 결과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A와 관련해서 B가 변화한다는 등의 현상만 알 수 있다. 물론, 오차도 크고, 오류도 있다. 그러나 오차는 계속 줄어들고, 오류도 줄어들 것이다. 어느 시점에는 상관관계도 하나의 질서로 인정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고 나니 처음에는 유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더라도 전통적인 사회과학으로부터 얻은 데이터 대부분은 전체적인 인간 행동, 상황, 사건 등을 고려할 때 ‘0’에 가깝다. 기껏해야 100명에서 1,000명 수준의 대상을 조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빅데이터는 그 수치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수를 분석한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서는 수많은 인간의 행동, 말, 감정 등을 디지털로 분석할 수 있다고 하는데, ‘디지털 빵가루(Digital bread crumbs)’라고 하고 이러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과정을 ‘현실 마이닝(reality miming)’이라고 한다.


단, 원초적인 기원은 발견할 수 없고, 발견할 필요도 없다. 그런 현실 세계에서는 빅데이터가 새로운 신이 된다. 우리가 아는 신은 전지전능하고 선악이 분명한 존재였으나, 빅데이터는 그렇지 않다. 다양한 원인이 있고, 그 경중은 따져볼 수 있지만,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결과를 알고, 그저 그 결과에 영향을 주는 요소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빅데이터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석유라고 한다. 단, 이 자원은 석유와 같이 중앙집권적인 방식으로 확보되거나 관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존 자원들과 성격이 다르다. 데이터는 공개되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 현재는 비즈니스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지만, 곧 공공영역과 교육 분야에서도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데이터가 분석되고 완벽한 인과관계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 인간의 행동 패턴 등을 밝혀서 대응하는 건 유용하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말한 ‘빅 브라더(BIg brother)’가 바로 빅데이터의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감시되고 그 가운데 얻어진 자료로 시민을 통제한다. 개인을 중앙정부에서 검열할 수 있고, 통제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자유가 아니라 모두 공개되고 언제라도 중앙정부에 끌려갈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데이터가 인간을 다스린다고 할 수 있다. 이미 CCTV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범죄자를 찾고, 사람들의 안전에는 도움이 되지만 마음만 먹으면 개인의 사생활 정도는 낱낱이 파헤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온라인 활동 등이 모두 기록돼 나의 속 마음까지도 분석하는 시대다.


그렇다면, 이러한 빅데이터는 교회와 어떤 상관이 있을까? 우선, 빅데이터를 통한 현상 분석은 흔히 말하는 초현실적인 부분조차도 해석할 수 있다. 수조 단위의 데이터가 분석되는 동안 현재는 기적이라고 말하는 현상도 데이터로 분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신의 섭리라고 여겨졌던 부분, 즉 현재의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들도 해석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기적이 아니라 우연의 산물이 된다(단,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해야 할까? 교회에는 빅데이터를 활용한 방법이 쉽게 반영되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선 한국 교회의 연령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흐름에 참여가 어려울 정도로 노화됐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새로운 세대가 교회의 주역이 될 때쯤에도 지금과 같이 퇴보 일색의 모습으로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다. 혹은 과학 기술이 덜 발달한 국가에서는 토테미즘 수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은 보수적 교회에만 제한되는 일이 아니다.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 극단적으로 수구적인 교회는 여전히 무당과 같은 치유를 권하면서 전염병을 확산하기도 한다. 아울러 보수를 자처했던 교회는(전광훈 목사 등) 전염병보다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해서 '애국', '신앙'을 팔아 먹고 있다. 나름 상식적인 모습을 보이는 교회들도 코로나 19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여러 이유 - 특히, 재정적인 부분 - 로 예배를 강행해서 언론의 포화를 맞기도 했다. 물론, 국가의 전염병 수칙을 잘 지키는 교회가 대부분이나 결론적으로 기도와 예배로 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런 교회에서 과연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만일이라는 가정을 하면서,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교회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조금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보자.


교인들의 수많은 정보를 교회는 수집한다. 직업이 무엇인지? 소득은 얼마나 되는지(헌금 액수를 보면 알 수 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행사에 참여도는 어느 정도인지? 자녀는 몇 명인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교우 관계는 어떠한지?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종류는 무엇인지? 등 교회의 관심에 따라서 얼마든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교회에서 수집하는 것이니 성도들 대부분은 적극적으로 응해 줄 것이다. 이런 정보를 통해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설교의 만족도 조사 등을 통해서 성도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설교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각 교인의 성향을 파악해서 SNS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감성적인 교인들에게는 감성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지성을 추구하는 교인들에게는 지성적인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보낸 메시지를 받고 위로를 받고, 격려도 받고, 한 주를 주안에서 살도록 노력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메시지는 빅데이터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지고 전달한 것이다.


“와! 오늘은 완전 나를 위한 말씀이네”, “내 마음을 정말 잘 알고 있구나!”


이제 이런 감탄사는 흔한 것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기술에 의한 것이다. 내 정보를 제공하고, 맞춤형 메시지를 수신하고 현재 마음에 와닿는 설교를 들을 수 있다.

소모임도 마찬가지다. 구역장(교회의 조직단위인데, 가장 작은 조직단위로 근거리에 사는 가정으로 구성한다) 등을 통해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구역 모임을 계획한다. 현재는 이래저래 핑계를 대서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빅데이터로 나를 완벽하게 분석해서 진행하는 구역 모임은 왠지 나를 위한 모임 같아서 참석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교회의 목회자들이 유능해서, 혹은 기도를 많이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 정도 수준으로 빅데이터를 활용해서 목회할 수준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충분한 규모여야 하는데, 규모를 따지면 결국 대형 교회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대형 교회도 빅데이터를 잘 모르고 준비하고 있지 않다. 준비하지 않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대형 교회의 교인들도 썰물 빠지듯 이탈할 것이다.


종교가 인류와 함께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즉 인간의 두려움, 즉 불 확신과 무지에 연유한 것들이다. 과학 발전으로 과거에는 상상의 영역에만 머물던 사건들이 팩트로 밝혀지고 있지만, 여전히 무지의 영역은 광대하다. 그리고 그 영역이 모두 개척되고 분석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리라는 판단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위치는 아니다. 현재와 같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대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건물이 점점 낙후되듯이 기독교의 본질도 미래 인류가 받아들이기에는 미신처럼 느껴질 것이다. 역으로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를 찾는 관광객이나 노령층이 과거를 회상하기 위한 장소로 교회를 찾을 수도 있고, 디지털 문화에 지쳐서 온기를 느끼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이 교회에 방문할지도 모른다.

이 정도 수준이 되면, 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라 문화 상품이 된다. 현재 유럽 교회와 성당이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듯이 한국 교회도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사실, 유럽 교회를 보면 한국 교회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다. 단, 유럽은 혁명이라는 커다란 변혁이 있었고, 한국은 유럽과 같은 혁명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차이가 있다.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당연히 활용해야만 한다. 물론, 빅데이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성모독, 그리고 어떻게 인공 지능을 활용해서 기계적으로 인간에게 메시지를 보내는가? 라고 하면서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과거 교회 역사가 늘 그렇게 저항하다가 뒷북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의학 분야에서는 백신(Vaccine) 사용에 있어서 창조 질서를 운운하면서 거부하다가 현재는 모두 사용하고 있으며, 전자 악기와 관련해서도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그렇게 반대하다가 지금은 전자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교회가 없다. 어차피 사용할 거라면, 선한 도구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현명한 판단이다.


‘연결’, ‘융합’ 그리고 교회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연결’과 ‘융합’이다. 사물인터넷(IoT)에서 만물인터넷(IoE)으로 옮겨 가면서, 수 조개의 사물과 사물,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이 연결된다. 기술적인 표준은 정해지겠지만, 과거와 같이 적과 아군을 나누던 경계로서의 표준은 사라진다. 물론, 보수도 진보도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고, 계속해서 그들의 태도를 고수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분 짓는 것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절한 개념이 아니다. 이제 과거의 적도 친구가 되고 현재의 친구도 계속 친구가 돼야 하는 협력의 시대인 것이다.


이런 시대에 기독교 정신은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레이코프는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에서 미국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말하면서 두 가지 다른 프레임을 제시한다. 하나는 ‘엄격한 아버지’상이며, 다른 하나는 ‘자비로운 아버지’상이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던 사건에 대한 해석이 보수와 진보가 다름을 설명한다.


한국 교회는 대부분 보수적인 견해에 대한 해석을 설파한다. 그러나 진보적인 해석도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자가 순종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신에 대한 명령을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거부하고 있다. 둘 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 것이다. 왕왕 기독교인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온전한 하나님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런 해석은 독단이다. 다양한 해석을 한국 기독교는 인정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로 기독교 내부가 분열하는 건 새로운 종교전쟁을 만들 뿐이고, 초연결과 융합을 말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침몰하는‘타이타닉’이 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이삭은 살았고, 두 가지 해석 방법 모두 하나님의 위신을 깍는 해석이 아니다.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는 공의를 강조하는 현대 기독교의 사랑이 부족함을 비판하고 있다. 균형을 이뤄야 할 교회에서 한쪽으로 치우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죽하면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등장할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독교가 현재와 같은 지위를 계속 유지할 방법은 새로운 시대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이끌어 가려는 노력, 즉 리더로 서려고 노력할 때 가능하다.


1907년, 조선의 기독교는 크게 부흥했다. 성령의 이끌어 주심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란으로 피폐해지고, 보호받지 못한 백성들의 피난처 역할을 교회가 감당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가난한 자, 약한 자의 안식처였고, 보호자였다. 기독교 정신은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줘서 3·1운동 당시 기독교 인구로 볼 때 엄청난 숫자가 참여하고, 33인의 대표자에 있어서도 다수를 차지한다. 기독교는 억압자에게는 저항이었고, 약한 자들에게는 사랑이었다.

이 정신을 4차 산업혁명과 연결해보면, 수직적인 구도에서 수평적인 구도로, 분절과 대립보다는 연결과 협력으로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과 어색하지 않게 연결할 수 있다. 초대 기독교 모습이 그러했다. 현실적으로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세계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교회 공동체 내에서는 만인 평등을 지향했다.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고 한 몸이 되는 융합을 권장했다.


이러한 정신은 엄청난 핍박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었고, 한국 초기 기독교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난다. 물론,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권력과 결탁했던 것도 사실이고, 이러한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부분은 비판받아 마땅하며, 현세대가 대신 참회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설득력이 있다. 다만 안타까운 건 현재 분위기는 일방향이다. 기독교의 공적은 무시하고, 현재 가시적으로 보이는 문제점만 중심으로 비난하고 있다. 교회의 대처도 폐쇄적이지만, 공격하는 확성기도 비방 이상의 목적은 없는 것 같다. 단순히 교회를 욕보이는 것 외에 다른 목표가 없어 보인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연결’과 ‘융합’이 중요하다. 과거 똘레랑스가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한국에는 홍세화가『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서 소개한다. 물론, 이 개념은 종교전쟁을 끝낸 후 생존을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사실, 경계에 가깝다. 그저 너의 생각과 너의 종교를 인정해 준다는 의미다. 그러나 융합과 연결은 경계가 아니다. 그러한 경계를 없애고 너와 나의 결합으로 새로운 생성과 발전을 이룩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현재 한국 교회 내부와 사회의 모습은 연결과 융합보다는 경계를 침범해서 영역을 넓히기 위한 전장인 듯하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건설적인 비판은 중요하다. 그러나 맹목적인 비난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변화해야 하는데 과거의 사슬에 굳게 매여 일보(一步)도 전진하기 힘든 상황을 조성하고 나서 발전을 말하는 건 망상에 불과하다.

모든 만물이 연결되고, 소통과 협력이 중요시되는 시대가 온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지금처럼 ‘섬’으로 존재하는 기독교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인멸(湮滅)의 위기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극단의 상황은 ‘섬’으로 존재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다양함을 받아들여 코이노니아를 만들 수 있다면, 교회는 다시 성장할 것이다.


이제 체질을 바꿔야 하고, 새로운 학습 공동체로 변화해야 한다. 산업화 시대에 규모로 밀어붙였던 전진은 이제 더 큰 장애물 앞에서 멈칫거리게 했고, 뒷걸음질하게 했다. 적응하지 못한 3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회는 우둔한 몸짓으로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해서 사라져 버린 공룡 신세와 유사해지고 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초대 교회의 신앙과 문화로 돌아가서 새롭게 사회를 선도할 수 있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와 교회의 관계를 분석하면 대체로 교회 위기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최근에 기독교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장로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교회 내의 50대 이상은 4차 산업혁명이 교회에 부정적인 역할을 할 거로 우려 한다고 하셨다. 당연한 예측이고 염려이다. 50대 이상은 4차 산업혁명을 잘 이해하기 힘든 세대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적응했지만, 과거 보수적인 기독교 교육을 받았던 50대 이상은 과학기술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힘든 세대다. 그러니 당연히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와 교회가 반(反)의 관계라고 여기는 건 당연하다.


다음은 영성의 시대를 강조한다. 인류의 역사는 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종교인이다. 그리고 더 불확실해지는 세계, 국가, 사회 속에서 의지처는 여전히 인간에게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영성 또한, 과학 기술의 태클을 받아야만 하는데, 바로 뇌 과학의 발전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은 뇌라고 말한다. 실제로 뇌의 여러 기능을 고려할 때 마음은 뇌가 되고, 뇌가 인간의 영혼처럼 여겨진다. 종교를 믿는 인간의 마음이나 영성이 뇌 과학의 연구와 맞물려 과학으로 분석되고 있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은 교회의 권력이 압도적이었을 때는 과학이 종교의 시녀였지만, 종교의 힘이 줄어들고 과학이 진보하기 시작하면서 둘의 관계는 경쟁자가 됐다. 그리고 지금은 진리라 여겼던 종교적 발상은 한낱 인간의 공상으로 추락하고, 과학이 진실을 대변하는 바로미터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가 새로운 시대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미 정보화 시대에 세상의 거센 도전을 받고 문을 굳게 닫고 철옹성을 쌓았던 교회는 이제 그 철옹성을 뚫고 들어 올 새로운 시대의 과학 기술을 어떻게 막아 낼 수 있을까?

철학적으로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한 포스트모더니즘도 틀렸다. 왜냐하면, 진리는 없다고 선포했지만, 진리를 향해 가는 인간의 노력이 진실을 밝혀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아바타》에서처럼 주인공이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니라(주인공이 장애인이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가상의 나를 선택했던 것처럼 세계는 ‘시뮬라크르’가 실제를 대신하기도 한다.


인간은 인간의 두뇌를 믿지 않고, 이제 기술을 믿게 된다. 빅데이터를 모으고, 그 데이터를 클라우드에 저장하고, 이를 알고리즘으로 분석한다. 확실한 인과관계는 모르지만, 정답에 가까운 것이 나온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점점 더 정교해질 것이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빅브라더’를 예견했고, 하루키는 『1Q84』에서 ‘리틀피플’을 가공해 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빅브라더’와 ‘리틀피플’이 동시에 존재할 것이다. 수많은 데이터 수집 장치가 인간을 관찰하고, 감시하고, 알고리즘으로 세부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빅브라더는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조장할 수 있고, 리틀피플은 인간을 유혹해서 소비적인 인간으로 남게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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