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를 본다』
『기억이 나를 본다』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Tomas Transtromer)(201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시를 읽는다. 시를 느낀다. 시를 감상한다. 시를 음미한다. 다 맞는 소리다. 그러나 좀처럼 시를 접하기는 힘들다. 한쪽도 안 되는 짧은 글, 시 속에는 천지 만물이 녹아 있고, 세상사(世上事)가 계속 흘러간다. 그래서 산문보다 이해하기 더 힘들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는데, 언어 중에서도 ‘시적 언어’를 손꼽아 치켜세웠다. “인간은 시 가운데서 정적에 이른다”라고 했는데 이 말이 하이데거가 ‘시적 언어’를 칭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시를 종종 접하는 편이다. 과거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를 좋아해서 번역된 전집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대표적인 시집도 몇 권 책꽂이에 가만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를 음미하고 감상한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다만, 시적 표현의 아름다움을 인정할 수 있으며, 좋은 구절은 외워서 어린 시절,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낭독해줬던 기억이 있다.
시는 연인들에게 낭만적인 사랑의 언어다. 그러나 혁명가의 시는 절대 군주의 심장을 겨냥하는 저항의 창(槍)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수백 년의 역사를 길길이 적어 놓은 역사책이기도 하다.
시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시공간은 온 우주를 담고 있다. 작가의 모든 시를 다 접하지 않았지만, 작가는 시·공간을 아주 넓게 활용하고 있다. 하늘을 이야기하다가, 땅을 관찰하기도 하고, 인간을 보다가 어느새 사물과 대화를 나눈다.
작가의 시는 어려운 철학적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화도 아니다. 다만, 일상적인 사물에서 시어를 발견하기에 그의 표현은 평범하면서도 심연을 헤치고 나가야 보이는 수정같이 감성적이다. 때로는 기계에 살아 있는 심장이 뛰고 있는 생명력도 부여한다.
지평선의 큰 건설 기중기는 대 도약을 원하지만 시계는 반대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멘트 관들이 바싹 마른 혓바닥으로 빛을 핥는다.
자동차 정비소가 한때의 곳간 자리를 차지한다. 『근교』 중
문명의 이기를 비판하지 않고 있다. 흔히, 현대를 부정하고 동경할 대상을 억지로 찾아가는 작가와 다르다. 그래서 참신하다. 그렇다고 현실을 완전히 긍정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저 현실의 딱딱한 차가움에 피를 흘려줘 다시 따뜻하게 움직이는 느낌을 주려하는 듯하다.
내가 사랑하는 조그마한 것들, 그들은 무게가 있을까?
수도 없는 초록의 방언들.
특히나 목재 가옥의 붉은 벽들.
풍뎅이들이 햇빛 속, 거름 속을 번쩍이고 있었다. 『열린 창』 중
우리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시는 인위적인 재료인 ‘목재’, ‘붉은 벽들’ 등과 같은 사물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생명 없는 것들에 호흡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고 있다.
시인의 시는 현실을 풍자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시는 종교적 경사가 심하여 반대로 정치·사회적 맥락이 거세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눈앞의 정치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 핵심인데, 그러나 그는 이러한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시의 길을 꿋꿋이 걸어왔으며, ‘침묵과 심연의 시’의 흐름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역자의 말』 중
시인의 시에 정치·사회적 맥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급진과 반동은 불행한 결혼 속에 동거한다.
서로를 갉아먹으면서, 서로에게 기대면서.
하지만 그 자식들인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모든 문제는 자신의 언어로 소리치는 법!
진실의 흔적을 따라 탐정처럼 길을 가라. 『역사에 대하여』 중
시인은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편하지 않을 뿐이다. 대부분 좌우를 선택해서 이념 논쟁에 끼어들거나 아니면, 중립을 지키면서 둘 다 비판한다.
그러나 시인은 새로운 방법을 감춰두었던 보물상자에서 꺼내서 말한다. “진실의 흔적을 따라 탐정처럼 길을 가라.”라고 선언한다. 탐정은 진실을 밝히는 자이다. 그는 공권력이 없기에 타인에게 어떤 위해(危害)도 가할 수 없다. 달리 이해하면, 비판자가 아니다. 그리고 탐정은 어디에 속하지 않았기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만의 길을 갈 뿐이다.
그리고 시인은 자본주의를 옹호하지도 않았다.
자본의 건물, 살인 벌의 꿀 벌통, 소수를 위한 꿀. 『경구』 중
다만, 그의 시선에 자연과 물질에는 잘못이 없다. 혹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있다.
자기가 지구를 돌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지구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자기도 속절없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명종곡(鳴鐘曲)』 중
지구는 인간이 돌리는 것도 아니며, 지구가 인간을 돌리는 것도 아니다. 지구는 그저 물리법칙에 의해 도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사실을 인간 중심적인 관점으로 간섭한다. 세상에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려고도 하고, 반대로 세상의 부조리함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광범위한 우주로부터 작은 풍뎅이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언어는 거대하면서도 촘촘하다. 평생 많은 시를 짓지 않았다고 하는데(1년에 3 – 4편 정도만 작시했다고 한다), 오히려 다작이 아니었기에 언어 하나하나에 우주를 담을 수 있었고, 작은 빗방울의 기어가는 소리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름 저녁이 회색이다.
하늘에서 비가 살금살금 기어 내려와
소리없이 착륙한다. 『긴 가뭄이 끝나고』 중
시인은 관찰력이 뛰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시어가 탄생할 수 없다. 그리고 시가 탄생하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수정을 거쳐야만 한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의 작가 류시화 시인은 본인의 시를 천 번까지도 수정했다고 한다(이 말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만큼 단어 단어 하나에 애착을 갖고 다듬는다고 할 수 있다.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중략)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기억이 나를 본다』 중
시인의 기억에는 숨소리가 있다. 기억은 곧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기억은 시인을 소리 없이 따라다닌다. 그리고 어느새 가까이 다가가서는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시인은 바로 그 기억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하얀 종이에 옮기는 순간, 기억은 새로운 시·공간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