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그대로 읽기” 31편

“배설 욕구가 이성을 지배할 때 ”

by 조작가Join

“노벨 문학상 그대로 읽기” 31편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하(下) 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Jorge Mario Pedro Vargas Llosa)(201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배설 욕구가 이성을 지배할 때 ”


위안부와 정신대를 생각해 보자


독일에서 ‘소녀상’을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국회의원은 관련 분야에서 금전적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다. 아마도 ‘옳거니!’라는 마음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소녀상’은 전쟁의 아픔과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여성이었음을 상징한다. 당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다. 특히, 반일 감정이 상당한 우리나라 정서를 고려했을 때, 위안부와 정신대 문제는 해결하기 쉽지 않다.

일단, 그 과오를 떠나서 작품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2차 세계대전 시, 일본은 위안부를 조직한다. 그리고 전쟁 말미에는 정신대를 만들어 지원받는다. 말이 자원이지 둘 다 강제적인 방법으로 모집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개 중에는 자처한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자처’라는 표현에서 많은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집집이 수색해서 여자들을 잡아간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자처’한 자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완벽하게 속았고 당시 일본을 조국이라고 생각해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참여한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역사를 조금 당겨서 살펴보면, 6·25 전쟁 이후 해방촌이라는 지역이 만들어질 정도로 미군을 상대로 한 윤락 여성이 많았다. 당시 우리나라 상황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역시 먹고 살기 빠듯해서 매춘이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매매를 하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될까?


작품은 창녀들로 구성된 ‘특별봉사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봉사대원들은 일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쫓겨날까 가 전전긍긍하기까지 한다. 소설에서는 자발적인 동원, 합리적인 보수를 제공한다. 위안부와 정신대에 끌려가거나 자원한 당시 아시아의 여성들은 합리적인 보수 따위는 받지 못했을 거로 생각한다. 전쟁 상황에서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위안부, 정신대를 떠올리면 강제적인 것, 그리고 일본의 만행, 아울러 우리 할머니 세대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의 침략 지배하에 있었던 아시아의 여성은 모두 비슷한 처지였다. 그리고 현재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일본을 상대로 강력하게 저항할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이기에 일본에 당당하게 요구하고 더 강력하게 배상을 촉구하고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분명 긍정적이다.


그러나 ‘특별봉사대’와 위안부, 정신대는 ‘자발’ VS ‘강제’로만 이해해야 할까? 객관적인 자료가 아닌 주관적인 애국심과 반일 감정으로 우리는 제대로 된 자료를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부분이 사이비 종교와 다른 부분이 있을까?

제발 오해는 말자. 필자는 위안부와 정신대의 차이도 알고 있으며, 대부분은 불법적으로 강제로 착취됐음을 잘 알고 있다. 단, 감정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를 바탕으로 이해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아울러 우리의 유사한 만행들 –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 군인들의 베트남 여성 착취 등 – 에 대한 사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면


수많은 사이비 종교는 리더가 사라지면, 몰락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교주들은 영생이라도 얻은 것처럼 스스로를 높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젠가 땅으로 돌아간다. 전 세계적인 종교 통일교의 교주 문선명도 현재 숨을 쉬지 않고 있다. 아직, 막대한 자원이 있어서 무너지지 않고 있으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코로나 19’ 기간에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신천지’도 그 교주 이만희가 죽으면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판탈레온 대위는 더 좋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 ‘특별봉사대’의 충성심을 북돋우기 위해서 제복을 입고 사망한 ‘미스 브라질’의 장례식을 치러준다. 이제 군대에서 이 모든 게 군대의 계획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린 것이다.

저는 지상에서 당신의 마지막 안식처가 된 이곳에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페루 육군 장교의 숭고한 정복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떳떳이 책임감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우리 조국 페루를 위해 봉사한 용감한 병사 자격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공포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중


정상적인 사고방식이었다면, 행동 이후 발생할 문제를 쉽게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임무에 몰입했다. 오직 명령만 수행할 수 있는 기계가 돼 정상적인 사고 작용을 스스로 거둔 것이다.

사이비 교주는 스스로 십자가형을 택한다. 그래야만 다시는 불한당 같은 군대에 잡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분을 구출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분이, ‘저들이 날 다시는 체포하지 못하도록 하라. 날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날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달라고 명령했어요.” 『본문』 중


그는 죽어 가면서까지 자신의 종교에 몰입했다. 이런 모습은 광화문 집회에 몰입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전염병,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본인들이 생각하는 가치만 추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이기주의자라고 부른다. 혹은 광신자(狂信者)라고 하기도 한다.

판탈레온 대위는 이제 명령에 따라 임무를 중단한다. 그리고 새로운 부임지로 떠나 명령에 똑같이 몰입한다.

“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장군님.” 판토하 대위의 목소리와 가슴과 눈은 기쁨에 들떠 있다. “제 의지와 상반된 것이긴 했지만, 군에 해를 끼쳤다는 자괴감보다 더 심한 벌은 없을 것입니다.” 『본문』 중


그리고 ‘특별봉사대’는 소멸한다. 사이비 종교도 교주의 죽음으로 세력이 약해졌다.


“어쨌거나 아마존에 존재했던 두 가지 악몽은 영원히 끝나버렸어.” 스카비노 장군은 바지 단추를 푼다. “판토하는 침묵은 지켰고. 예언자는 죽었고. 특별봉사대원들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방주’는 해체되었지.” 『본문』 중


광화문 집회의 선봉에 섰던 한 목사가 떠오른다. 그는 아무도 위에 두지 않았다.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는 말도 서슴없이 했고, 코로나에 걸리고 나서는 북한의 바이러스 살포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내뱉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사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 그는 사회에서 격리돼 좁은 공간에 갇혀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집회의 욕구들을 표출한 무리가 있으나, 전과 같지 않은 모습이다.


여전히 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무효와 무죄 석방을 위한 천만 명 서명을 받는 곳이 있다. 언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천만 명을 못 채운 듯하다. 이들의 위세도 조금씩 꺾이고 있다. ‘우리 공화당’은 총선에서 모두 낙선을 면치 못했다. 그들을 지지해주는 국민이 별로 없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파라솔을 펴놓고 서명 용지를 거리에 전시하고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심정으로 서명을 받고 있다. 아마도 정치적 협상으로 천만 서명을 달성하기 전에 전 대통령이 출소할 가능성이 크다. 이상한 대목은 전 이명박 대통령 석방을 위한 서명은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박근혜로 이어지는 권력은 또 다른 사이비 종교적 배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육체적 배설과 정신적 배설


육체와 정신을 굳이 구분하는 건 이분법적인 사고라 지향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뇌 과학이 발전한 지금 이 시대에 정신이 어떻고, 육체가 어떻고 하는 식의 발언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작품 자체가 정신과 육체를 구분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두 가지를 좀 나눠서 생각하려 한다.

어떤 게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까? 개인적으로는 정신적 배설이 더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육체적 배설은 정신적인 문제보다 그 문제가 덜하다. 그리고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배설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다.


유튜브가 성장하고, 널리 활용되다 보니 다양한 목회자의 설교를 청취할 수 있다. 과거에는 다니는 교회 목사 설교에만 귀 기울이기던 교인들이 이제는 기호에 맞게 설교 뷔페에서 골라 들을 수 있게 됐다. 다양한 설교를 듣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본인이 원하는 메시지를 듣기 원하는 정신적 배설 욕구가 있다. 내 행동과 생각을 합리화해 주는 소리를 갈구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현대인은 외로움이라는 병을 달고 살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려 하지 않는다. 그 마음을 꺼내 놓을만한 사람도 주변에 없다. 아무리 SNS를 열심히 해도 이러한 외로움은 달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 맞는 걸 찾아보고, 들을 수밖에 없다.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전염병도 막지 못하는 애국심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모인 사람들은 그들의 발을 옮기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쏟아 놓고 싶은 배설, 그래서 속을 시원하게 비우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배설은 진짜 배설이 아니라, 가짜 배설이었음을 눈치챈 사람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달라질 게 얼마나 있었을까? 그들은 정신적 배설을 위해서 진실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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