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한 제언(13)

새로운 시대, 선도적인 교회 모습

by 조작가Join

한국 교회 편


새로운 시대, 선도적인 교회 모습


성장과 발전


4차 산업혁명 시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는 어떤 숫자의 버전(Version)이 될까? 산업혁명은 버전 4.0이다. 네 번째 업그레이드라는 의미다. 교회사를 전공한 한 지인은 한국 교회 2.0을 말했다. 이 말은 기존 교회를 1.0으로 보는 것인데, 130년 동안 변화가 없었다는 자책이기도 하다.

물론, ‘성장’과 ‘발전’은 다르다. 쉽게 설명하면, 성장은 양적인 부분이고, 발전은 질적인 부분을 말한다. 성장은 경제성장 몇 %가 중요하지만, 발전은 평등, 행복 등과 관련한 가치가 더 중요하다. 세계 경제는 여러 번의 부침이 있었음에도 전체적으로 볼 때 성장했다.

그러나 선진국을 비롯한 한국은 저성장 기류에 편승했고, 과거처럼 고도성장은 힘들 것으로 예상한다. 세계 경제 엔진으로 자부했던 중국도 그 성장세가 주춤하고 있고, 역사적으로 봤을 때 어떤 국가도 영구적인 고도성장을 달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경제의 방향은 ‘성장’ 중심에서 ‘발전’으로 전환해야 한다.


과거 우리나라의 국가 주도형 성장은 고도 경제성장이라는 빛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보릿고개, 현실의 굶주림을 과거 흑백 자료 화면의 기억으로 넘겼고, 넉넉지 못한 가구 구성원이라 할지라도 가족 수대로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게 했다(물론, 아직도 스마트폰을 구비하지 못한 가구나 개인도 있다).

그러나 ‘상대적 박탈감’은 어느 시대보다 커서 자살률이 OECD 회원 국가 중 1위였으며, 행복지수도 하위권에서 맴돌고 있다. 과거처럼 경제 5% 수준의 높은 성장은 어려운데, 정부는 여전히 양적인 성장만이 성공한 정부의 기준으로 여기고 제시한다. 그러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면 한국 경제성장은 일시적인 수준이라면 모를까 지속적인 고도성장에 대한 바람은 환상이다. 결론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발전’을 염두해서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의 중심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언급됐다. 사실이다. 과학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 복리를 위함이다. 최근에는 환경문제를 비롯한 여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류의 안락한 삶을 위한 것이다.

대한민국 4차 산업혁명의 최종 목적도 국민을 위함이다. 그러나 다양한 통계를 볼 때 국민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쉽게 단정하기는 힘들지만(북유럽의 복지, 성장 등과 행복은 분명히 연관이 있다), 성장과 행복이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성장이라는 주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숫자에 연연하고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 그림을 보고 어른들이 모자라고 말하는 바람에 화가의 꿈을 접은 아이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아이는 어른들이 숫자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숫자가 우리가 현재 말하는 숫자와 다른 말이 아니다.

아이의 삶 속에서 행복은 숫자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수치로 보여주는 경제성장에 대한 장밋빛만을 추구한 결과 많은 국민의 꿈과 행복은 구름처럼 사라졌다.


돈이 없으면(혹은 조금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포기를 생각한다. ‘루저’라는 말이 등장했고, ‘충(蟲)’시리즈가 등장했다. 온 국민이 모두 패배자이고 벌레가 돼 버린 부정적인 현실에 봉착했다.

한국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 국민의 자부심은 모두 숫자에 연관된 것이었다. 거리마다 걸린 수출 00억 불 돌파, 1만 달러 시대 등 모두 숫자가 중요했다. 그런 숫자에 연연하는 동안 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이제, 잃어버린 행복과 꿈을 찾아야 한다. GDP가 올랐다고 해서 삶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면, 숫자는 낮더라도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양적으로 성장보다도 질적으로 발전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국가나 사회 모습과 유사한 교회 역사를 볼 때, 현재 상황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개신교는 130년 만에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종교가 됐다. 양적으로 정확한 성도 수는 알 수 없지만, 최소 국민의 10% 이상이 교회에 다니는 것은 확실하다. 양적으로는 충분히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해외 선교까지 포함시킨다면, 양적인 성장과 영향력은 더 확대된다.


교회의 성장과 발전


그렇다면 질적인 발전은 어떨까? 한국 교회 버전은 도대체 몇인가?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면서 써야 하는 숫자는 version 2.0일까? 아니면, 새로운 혁명과 같이 4.0을 써야 할까?

앞에서도 분석했듯이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교회는 산업화와 더불어 흥했고, 3차 산업혁명 시대의 끝 무렵에는 주춤했다. 이렇게 본다면, 개신교는 19세기 말, 2차 산업혁명 시대에 한국에 수용된 것으로 볼 수 있으니, 최초 시기를 Version 1.0이라고 할 수 있고, 이후 고도의 성장기를 Version 2.0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전 시대의 종착과 3차 산업혁명의 본격적인 발전 속에서 적응하지 못했던 것을 고려할 때 교회는 여전히 Version 2.0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질적인 발전은 어떨까?


질적인 부분은 숫자로 명확하게 따져볼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이미지를 따져봐야 한다. 개신교는 도입 초기에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에 평등사상을 전파했다. 신식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처음으로 도입했고, 청일, 러일전쟁 등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목숨조차 부지하기도 힘들었던 민중의 보호기관이기도 했다. 이 시기를 Version 1.0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대부분 교회는 일제의 신사 참배 요구에 순응했고, 독재 군부정권을 지지했다. 교회 시스템은 늘 피라미드 구조였고, 소수가 권력을 소유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장 가도기에 권력은 더 비대해졌고, 부정부패가 교회 내에 만연해졌다(물론, 초대형 교회들이 주로 그랬다). 교회 개혁을 위한 새로운 시도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대부분 교회의 목적은 성장이었고, 담임 목사의 목표는 낙후된 교회 건축이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언론의 집중포화 속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축적됐고 지금까지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해소할 생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거대한 교회 건물만큼 그 출입문도 웅장해서 사회와 구분된 경계석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한국 교회는 Version 1.0에서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부정적인 이미지가 기독교가 해왔던 선한 일들마저 덮어 버렸다. 역으로 Version (–) 1.0일 수도 있다. 특히, 코로나 시대의 교회는 확실히 진보가 아니라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새로운 버전을 제시해야 한다. 성장은 한계에 봉착했다. 물론, 선교를 생각한다면, 성장 버전은 Version 3.0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장보다 질적인 부분이다. 교회 발전은 교회 내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사회적인 신뢰를 회복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건강한 공유경제와 새로운 개념의 공동체(네트워크 커뮤니티)를 바탕으로 한 선도적인 기관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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