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한 제언(14)

사라진 평등

by 조작가Join

한국 교회 편


사라진 평등


기독교가 조선에 가져온 혁신적인 사상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만민 평등사상’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아래서 평등하다는 뜻이다. 사회적으로 위계질서가 철저했던 초대 교회 시대에도 평등은 강조되었다(물론, 지금과 똑같은 수준의 평등은 아니다. 남녀차별이 존재했고, 노예가 존재했던 시대다).

복음서에는 여자, 아이, 병든 자, 죄인 등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셨다. 물론, 바울 서신을 훑어보면, 가부장적 권위를 존중한 부분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를 세웠던(교회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바울의 조치와 사상은 예수와 비교할 때 보수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바울 사상 역시 혁신적이라 할 수 있다. 위계질서를 인정했지만, 각 계급의 우월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각 계급에 속한 자들에게 서로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 그의 메시지였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 지체라고 설교했지만, 이미 계급이 나누어져 있는 당시 시스템을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부터 평등은 기독교의 근본 사상이었고, 그 사상이 조선에 들어왔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의 현실은 금수저와 흙수저가 등장할 만큼 경제적으로 구분된 사회다.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 의회, 지방자치단체지만, 권력은 분산되지 못했고, 오히려 중앙으로 몰리는 현상을 보여줬다. 그리고 지방이라 하더라도 토호세력이 이권을 나눠 먹는 행태가 보편화됐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다. 독립, 민주화 등을 위해 앞장선 교회도 있지만, 대부분은 불평등을 당연시하여 사회 위계질서를 지지했다. 도대체 ‘하나님 아래서 평등함’이라는 초대 교회부터 내려오는 공평함은 어디로 간 것일까? 과거 냉전 시대에는 평등을 외치면 ‘빨갱이’로 몰렸다. 공산주의가 말하는 평등은 결과의 평등으로 강제적이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말하는 평등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다. 자발적이며, 그 자발적인 헌신과 자선을 통해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가 모두 동등하게 생존해야 함을 전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철저히 평등과 거리가 멀었다. 교회에서의 평등을 정치와 경제라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고, 신성한 교회에서 세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거부감이 있었다. 그러나 팩트는 교회에도 정치가 있고 경제활동이 있다.


교회 정치 민주화


권력을 갖게 된 교회는 철저히 권력자의 모습이었다. 루터의 종교혁명도 신앙적으로만 이해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부분이 맞물려서 루터의 개혁 상황을 만들어 준 것이다. 오히려 루터가 정치적 상황을 잘 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그를 위협했던 구교 회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후 세력의 비호를 받았고, 후에는 그를 지지했던 농민을 외면했다. 루터의 개혁은 적어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건 아니었다. 교회에서 거의 성인 수준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지만, 그에게 자유와 평등사상은 특별한 계층을 위한 것이었지 만민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다른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 관계도 좋지 않았으며, 자신의 사상과 다른 자들과의 교류를 선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렬한 비판자였다.

루터의‘만인 제사장 설’은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해석은 현재에 이르러서 가능한 것이지 루터의 행위를 보건대 현재와 같은 보편적 평등을 바라거나 이해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치적 동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등장한다. 초대 교회보다 훨씬 앞서서 정치라는 표현이 사용됐으며, 따라서 교회에서 정치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을지라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어를 잘 아는 사도는 정치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교회 역시 많은 소송에 휩싸였다. 흔히 말하는 ‘라인’을 따졌고, 돈 문제로 인한 소송도 적지 않았다. 파벌이 있었고 경제적 갈등이 존재했다. 이런 쓸데없는 소요로 인한 낭비를 막고, 애써 세워놓은 교회 공동체의 훼손을 막기 위해 바울은 사랑을 말하고, 평등을 말했다. 바울은 직분은 인정했지만, 그 높낮이를 규정하지는 않았다. 은사를 말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아래서 평등함을 강조했다. 지금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는 분열됐고, 그 모습으로 인해서 많은 오해를 양산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 시대의 교회는 고거 토테미즘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 교회는 피라미드 형태의 조직이다.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아왔는데, 조직도가 피라미드형으로 이뤄지지 않은 교회는 본 적이 없다. 최근에는 다양한 조직도가 등장해서 네트워크 모양, 원 모양 등으로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끝은 항상 ‘당회장’ 혹은, ‘당회’이다.


교회는 플라톤이 말한 ‘가디언 십’을 추구한다. 즉, 철인 목사를 원한다. 교황의 무오류성을 비판하면서 탄생한 개신교는 당회장의 무오류함을 원한다.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함을 알지만, 암암리에 그러길 원한다. 하나님 아래 모든 성도가 평등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당회장을 중심으로 한 직분 자들이 권력을 차지한다. 그리고 나머지 성도들은 어떤 일들이 진행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교회가 ‘잘하겠지.’라고 생각할 뿐이다.


정치적 평등은 구성원들에게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데, 교회는 투명하지 못하다. 사회적으로도 교회는 치외법권에 속한다. 종교세를 부과한다는 국가의 액션도 쉽지 않다. 수많은 고발과 비리의 원인이 투명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것임을 교회는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개선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서는 그들의 잘 못을 회피하거나 변호하는 데 곡해하여 방어벽으로 삼는다.

우리 사회는 평등을 추구하지만, 평등 사회는 아니다.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혹, 먼저 평등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교회가 우선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평등을 실천할 당위성이 있다. 그리고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조직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대예배와 주요 회의를 동시에


아무리 위에서 말해도, 교인들이 반응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많은 교인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교회는 재직 회의와 연간 예결산과 같은 중요한 안건을 다루는 회의는 예배 시간에 포함해서 다뤄야 한다. ‘거룩한 예배’를 모독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연장해서 진행하면 된다. 국가·사회적으로도 ‘주민자치예산제도’ 등으로 주민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하려고 한다. 물론, 이런 부분에 관심 있는 주민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교회와 비교하면 일취월장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주민이 결정한 예산으로 진행하는 사업이 많아질수록 점진적으로 참여가 늘어나리라 예상할 수 있다.


행동경제학의 대표적인 학자 리처드 탈러가 주장한 ‘넛지’를 적용해야 한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교회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대부분 성도가 참여하는 예배 시간을 활용하는 ‘넛지’가 필요하다.

교회에서 수립한 계획과 사업 진행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많은 성도의 관심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들이 가장 많이 모일 수 있는 시간에 공지하는 것이 옳다. 예배 시간에 광고 시간이 배정돼 있는데, 왜 회의 시간을 배정할 수 없는가?

교회의 정치적 평등은 바로 주요 회의에 교인들이 참여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교회 정치는 밀실 야합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당회장이나 당회에 권력이 집중됐다. 이러한 중앙집권적인 상태를 개선해서 더 많은 성도가 권한을 행사하고 의무를 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첫걸음이 주요 회의를 대예배 시간과 연동해서 진행하는 방법이다.


당회의 확대 : 확대 당회 추진


이 부분은 절대적으로 개혁이 필요한 부분이다. 대부분 교회는 당회 결정이 절대적이다. 당회는 당회장 담임 목사를 필두로 시무 장로들로 편성된다. 장로들은 일정 선출 형식을 거쳐 임명된다. 흥미로운 부분은 여자 성도의 최종 단계 직분인 권사에 임명되는 자는 당회에 참여하지 못한다. 교회에 따라서 여성 장로가 있긴 하지만, 수치로 따진다면 무의미한 수준이다. 과거 가부장적 권위를 거스를 수 없었던 시대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21세기를 한참을 지난 지금도 여전한 이유는 무엇인가?


장로는 교회의 어른을 말한다. 장로로 추대받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교인으로 생활해야 한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꾸준히 이어가는 가운데 다른 단계의 직분을 거친다. 또한, 각 부서를 두루 경험하면서 열심히 봉사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여기에는 헌금 생활도 해당한다).

과거에 어른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권위를 보장받아야 했다. 세대 차이가 크지 않았던 과거에 장년은 청년의 모델이 되었으며, 노령층 성도는 장년들의 미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리버스 멘토링’이 필요할 정도로 중장년이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문화적 흐름이 거세고, 과학 기술의 발전은 중장년을 거의 원시인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현재 수없이 만들어지는 ‘줄임말’은 일정 수준 연세가 넘은 장년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이다.


교회 미래를 과거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것은 몰락을 자처할 뿐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시스템을 조성해서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이해서는 기본적으로 과두정을 연상시키는 당회를 개방해서 확대 당회를 속행해야 한다. 전체 인원의 1%를 조금 상회하는 당회에서 모든 안건을 다루고 결정하는 건 문제가 있다. 모든 교인이 참여하는 공동의회는 또 다른 성격이라 하더라도 현재 수준을 개방해서 다양한 교인이 모여서 회의를 진행하고 의결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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