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여성 인권 성장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성(性)으로서 마땅히 대우를 받아야 함에도 여성 인권이라는 표현 자체의 등장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성 인권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는 인격체이니 말이다.
성경에서조차 사람을 셀 때 여성은 포함하지 않았으며, 예수가 여성을 파격적으로 대우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기초를 닦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바울도 당시 사회 분위기를 쉽게 극복하지 못했다. 바울은 예수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한 것처럼 남성이 여성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을 뿐이다. 여전히 여성은 남성 아래에 있다.
교회 내 여성 교인의 수는 남성성도 수를 넘는다. 교회는 여성들이 중심이다. 여성들이 있어야 운영될 수 있다. 그러나 목사 안수부터 시작해서 주요 직분은 남성 교인이 차지한다. 구성원이 훨씬 적은 남성이 교회의 중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한다.
장로와 비견할 수 있는 권사의 권한은 상당히 약하다. 교회의 교인 60% 이상이 여성이라고 할 때 당회에 여성이 한 명도 없는 교회는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하나님 앞에서 평등을 외치지만, 교회 내에서는 여전히 가장 기본적인 남녀평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과거 세대를 고려하면 장로들의 사회적 지위와 교육 수준 정도가 권사들보다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 사역을 논의하고 결정하는데 여성들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비판하거나 침묵했을 것이다. 혹, 진보적인 교단은 미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했을지 몰라도 교회 조직에서 여성 권한을 신장시키려는 구상은 거의 없었다.
고위직책에 여성이 포함된 조직이 위기를 더 잘 극복한다는 결과가 있다. 더 나아가 리더 그룹에 여성이 포함된 조직일수록 더 발전할 수 있다고도 한다. 이런 자료를 살펴보면, 교회에서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는 지금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않을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드라마도 ‘여인 천하’ 등을 포함해서 여성이 권력을 탐내면 국가기반이 흔들리는 것처럼 제작된다. 그러나 폭군의 폭정은 여성이 아니라 대부분 남성의 몫이었다.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 자체가 ‘침소봉대(針小棒大)’의 오류이다. 현재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좋지 않은 언어들이 파생되고 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표현이 여성에 대한 보편적 이해나 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
애초에 부정적인 현상을 보편화시킬 정도로 여성 권한이 신장된 것도 아니다(단 한 번 여성 대통령이 나왔고, 그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여자는 안돼’라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사회가 아직도 가부장적인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일부 몰지각한 여성들로 인한 오해이다.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 어떤 기관이나 조직보다 가부장적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교회에서 여성의 권한이 신장되면, 한국 여성의 지위가 혁신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창조하셨다는 현대판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예수와 바울의 여성에 대한 메시지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혁신적이었다. 현재 교회는 그 메시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 변화의 엑셀을 더 힘줘서 밟아야 한다.
다음으로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성차별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오해를 풀 수 있는 대화 채널이 다양하게 형성돼야 한다. 여성의 권한이 신장되고 쿼터제 등이 도입되면서 역차별을 주장하는 남성들이 많다. 기본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채널이 부족했기에 오해가 갈등을 낳고, 적대하는 문화가 조장된 것이다. 일부 여성은 남성의 군 가산점 제도에 대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여성들의 출산에 대한 국가적 보상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이런 논쟁이 숱하게 있었지만, 쌍방이 토론하고 원활하게 조정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은 없다.
교회는 남녀 차별을 인정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아래 잘못된 것임을 시인해야 한다. 그래야만 조금 더 발전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보수꼴통’으로 인식되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 이와 같은 남녀관계의 개선을 시도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할 경우 새로운 혁명 시대의 교회는 과거 개혁적인 이미지를 되찾을 수 있다.
초기 한국 기독교는 선진문물을 반영해서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다. 그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만민 평등사상은 개화기에 민중을 계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제 교회는 외부에서 수입한 개혁적인 사상이 아닌, 자체적인 갱생과 새로운 신앙적 가치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왜곡된 이해는 오해를 낳게 하고 갈등을 조성한다. 현실 속에서 교회는 갈등을 화합으로, 오해를 이해로 바꿀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당회에 여성들의 참여를 적극 권장하고, 장로 선출에 있어서 여성 쿼터제를 도입해야 한다.
위에서는 여성 교인들의 당회 참여와 권한 신장을 제안했다. 교회 내 남녀평등이 중요함을 언급했고, 그 당위성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당회와 관련한 제언을 하나 더 하자면, 다양한 세대가 참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ㅜ국가·사회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청취하려고 여러 방법을 시도한다. 그러나 교회는 어떠한가? 다양한 계층이 있는데 여전히 한 가지 목소리만 내고 있다. 마치 그 목소리가 진리인 것처럼 교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혁명 시대를 고려하면 현재 당회는 너무 고령화돼 있다. 아무리 빨라도 대체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에 장로 임직이 가능하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거부하게 된다. 마음이 원해도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 좋은 말로 신중해진다. 그리고 그 신중함은 현상 유지를 선호한다. 현재 코로나 전염병의 창궐에도 꾸준히 교회에 참석하는 것도 한국 교회가 늙었다는 증거이다. 아울러 항상 비슷한 연령의 참여자들과 논의하기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쉽게 나오지도 않고 혹 나온다고 하더라도 쉽게 반영하지 못한다.
필자는 교회에서 ‘비전 추진단’에서 활동했는데, 확대 당회, 공동의회, 여성 장로 쿼터제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지만, 단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아울러 ‘비전 추진단’ 평균 연령이 50대가 넘는 상황에서 청년부나 고등부 임원 정도는 참석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으나, 결론적으로 새롭게 참석한 인원은 청년부 최고령자였다.
그리고 ‘비전 추진단’의 최종 임무는 교회 증축과 관련한 것이었다. 하드웨어의 보완이 필요한 상황이긴 했지만, 구태의연하게 과거 방식으로 건물을 증축하기 위한 논의로 1년을 보냈다는 게 안타까웠다. 이후 새롭게 ‘비전팀’을 운영해서 계속 논의하기로 했으나, 얼마나 새로운 의견과 새로운 시대를 반영한 콘텐츠가 교회 내에 반영될지는 미지수다.
복음서를 보자. 저자들마다 같은 현상을 보고 들어도 깨닫는 핵심 포인트가 달랐다.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를 불렀을 때 그들의 직업은 각기 달랐고, 출생 배경도 달랐다.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양성을 고려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차별을 방지할 수 있다. 서로 동등함을 인정함으로써 협력 가능성을 높인다. 반대로 위계질서는 협력의 가능성을 축소시키고, 상명하달식의 조직을 만든다. 가야 할 길이 하나밖에 없을 때 상명하달식은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길이 다양할 때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당회 구성의 범위는 상당히 협소하다. 여성은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며, 청년층과 같이 연령이 낮은 계층은 교회의 중요한 사업과 계획에 작은 의견을 반영하기도 힘들다. 물론, 대다수 교인은 당회의 결정에 관심이 없다. 관심 없는 교인을 질책하기 전에 얼마나 교인들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는지 따져봐야 한다.
일정 수 이상 출석하는 교회는 다양한 구성원이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구성원이 모여서 회의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시공간을 마땅히 마련해야 함에도 교회는 힘써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세대 차이가 있고, 같은 세대라도 생각이 다르다. 교회의 중요한 사역에 대해서 교회 구성원들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시공간이 있어야 한다.
대형 교회라 하더라도 극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대예배 시에 모든 교인이 한자리에 모여서 회의할 수 있다. 교회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 방식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별다른 이유 없이 실행하지 않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직접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 정치학계에서는 1987년 이후 민주주의 발전이 정체됐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촛불시위 등 다양한 행태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최종적인 정치적 대안을 만들지는 못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으나, 대중은 쉽게 단기간에 뭉칠 수는 있지만 이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해서 다시 와해되기도 쉽다(과거 혁명 등을 보라).
대선과 지방선거를 봐도 현재 집권당이 잘할 거 같아서 지지하기보다는 다른 당들과 큰 차이가 없어도 대안이 없기에 표를 준 것으로 보인다(과거 새누리당 시절 현 민주당이 결정적인 표를 얻기 힘들었던 이유와 유사하다).
교회 민주주의는 한국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직접적인 힘이다. 교회와 정치를 연결하면 부정적인 편견으로 바라보는 교인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 언급했듯이 기독교는 정치와 무관한 종교가 아니라 밀접한 종교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현재도 조찬 기도회 등 국가와 관련한 종교행사가 버젓이 있다(조찬 기도회 진행자한테 들은 것인데, 참석하는 목사들의 좌석 배치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조찬 기도회 시 무릎을 꿇어서 크게 (부정적인) 이슈 된 적이 있으며, 주요 기관의 리더로 선출된 목사한테는 대통령의 축전이 어김없이 전달된다. 이런 사례만 봐도 교회와 정치의 관계가 분리됐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 민주주의의 발전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다.
과거 구한말에 만민 공동회가 있었다. 그 실효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백성이 함께 모여서 안건을 논의하고 의결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었다. 현대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의 결합 형태다. 물론, 스위스처럼 직접민주주의가 실행되는 국가도 있지만,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국가는 여러 가지 제한 물리적, 심리적 제한 등 -으로 거의 없다.
간접민주주의는 국가의 규모와 관련이 있는데, 현대 국가는 규모가 크다 보니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하에 국민, 혹은 시민을 대표할 수 있는 대표자를 선출해서 효율성을 높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과 절차를 국민(시민)이 직접 선택한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에 만들어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제도는 국민이 정하기 전에 만들어졌다. 이후 개정도 국민이 직접 관여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관여했을 뿐이다. 국민이라는 개념이 먼저 존재한 후에 국민이 태생한 격이다.
대의민주주의는 한계에 봉착했다. 대통령 선거도 당선자가 전체 투표자 50%를 가져가지 못한다. 그리고 여당의 지지율이나 득표율이 낮다고 해서 정권이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야당이 대안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선거를 치른다(지역주의와 관련해서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났고, 이후에 박정희, 김대중 후보의 선거부터 지역주의가 등장했다). 왜냐하면, 획기적인 정책적 대안이 없으며, 혹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을 설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전자민주주의를 제안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보류되고 있다. 실제로 전자민주주의가 실행될 경우 디지털 격차가 심한 현재 상황을 고려한다면, 사용자 비율이 낮을 수밖에 없다. 혹은 해킹의 가능성을 염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행이 어려운 가장 민주주의 절차에 반영되는 투명성이라는 거울을 현 정치인들이 적응하지 못하거나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선출직에 대한 기대감은 현저히 떨어지고, 불신이 확대되고 있다. 시민단체를 기대했지만, 한국 시민단체 수준은 양과 질적인 차원에서 선진국과 비교할 때 현저히 떨어진다. 정치권력은 이미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소수만의 향유 물이다. 누가 선출돼도 달라지는 게 거의 없다.
이러한 구태의연함으로 인해서 국민은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이런 무관심 속에서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싹조차 틔울 수 없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이어서 정치적 스펙트럼이 제한돼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교회의 ‘전 교인 공동회의’이다. 말 그대로 교회 전 교인이 모여서 교회의 현황을 논의하고 토론해서 결정하는 것이다. 교회가 지역 사회와 연결돼 있다고 할 때, 지역 문제도 다룰 수 있다.
물론,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하고 편파적인 정치적 성향으로 와전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서 정치인의 참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면 된다. 또한, 의제를 논의할 때도 교회와 관련한 문제는 교회 내에서 해결하도록 하고, 지역과 관련한 부분은 지방단체나 지역 의원과 협의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전 교인 공동회의’는 직접민주주의를 현실적으로 실행하기 힘든 현시점에서 새로운 실험이자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참여하는 교인이 정치에 관심 두는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다. 아울러 정치의식도 고양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현재 지방자치단체 등을 견제할 수 있는 민간 기관이 전혀 없는데, 이를 상보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기구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