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자유인가? 내어 준 자유인가? 어쨌든 잃어버린 자유”
『염소의 축제』상(上)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Jorge Mario Pedro Vargas Llosa)(201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독재, 혹은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독재와 전체주의는 늘 어깨동무를 하기에 굳이 따로 분리할 필요도 없다. 대표적인 전체주의와 독재 국가는 히틀러 시절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일 것이다. 이후 냉전 시대 스탈린의 소련도 독재이자 전체주의였다.
외국의 사례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살펴봐도 쉽게 알 수 있는데, 시작부터 독재로 시작해서 그 독재가 멈추기까지 30년(1948년부터 1979년까지)이 걸렸다. 물론, 그 잔당들이 지배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10년 이상을 더 연장해야 하지만, 어쨌든 국민의 열망으로 헌법이 수정(9차 개헌)된 걸 생각하면 상징적으로 1987년에 독재가 중단됐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독재는 정치 철학적으로 좋은 제도가 아니다. ‘가디언 십’이라고 하여 철인 통치를 운운했던 플라톤 등이 있지만, 실제로 철인 통치가 실현된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싱가포르와 같은 작은 국가는 민주주의 지수에서 형편없는 점수를 받는 독재 국가이다. 그러나 청렴 수준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국가여서 일반적인 독재 국가와는 결을 달리한다. 아울러 많은 국민이 괜찮은 생활수준을 유지한다는 점도 여느 독재 국가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독재자를 희화화한다. 그리고 독재자가 죽고 난 후 그 세력들이 몰락하는 모습도 재미있게 그린다. 잔혹함과 웃음이 함께 있는 독재 시대를 작가는 리얼하게 다룬다.
“미친놈들이 미친 짓을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풀어주도록 하게.” 첩보부대장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너무 늦었습니다. 각하. 그들은 어제 상어 밥이 되었습니다. 각하가 지시하신 데로 산체로 던졌습니다.” 『본문』 중
절대적 충성을 강조하고 그런 충성을 실행으로 옮기는 세상이기에 통치자의 말은 번복할 기회조차 없다.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독재자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우스운 상황이다.
“공포와 비굴과 이부가 습관이 되어 자유의지나 심지어 호기심마저 상실한 나머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트루히요를 우상화했다는 걸 알게 되었지.” 『본문』 중
독재자는 어쩔 수 없이 본인을 우상화할 수밖에 없다. 무오류성을 강조하는 게 그들의 특징이다. 그전에 민중은 그들의 자유를 반납해야 하는 과정을 거친다. 사실, 독재자의 출현은 독재자의 욕심과 민중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모든 잘못을 독재자에게 전가할 수는 없다.
“그건 그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랑 때문이었어. 아이가 권위적인 부모를 사랑하면서 채찍질과 구타가 결국은 그 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거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야.” 『본문』 중
독재자는 당연히 자유를 억압한다. 그래야만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염소의 축제』도 독재자가 모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한다. 실제로 존재한 인물과 일련의 사건을 허구로 재구성했지만, 모든 게 상상이라고 할 수 없다. 작가는 역사를 찾았고, 세밀하게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염소’가 지배하는 국가를 상상했다.
물론, 작품은 독재와 자유, 민주주의를 다루지는 않는다. 바르가스 요사가 꽤나 정치적인 인물이었던 것을 고려했을 때 작품은 독재의 비극과 그 비극의 당위성을 다루지만, 자유나 민주주의를 키워드에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작품을 읽다 보면, ‘염소’가 다스리는 국가의 답답함, 그리고 공포를 조금씩 느낄 수 있다. 1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물론, 당장 향유하는 물질적 풍요는 각각 다르지만, 그 모든 것들이 수령의 한 마디에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민간인들보다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은 자유를 모두 빼앗긴 상태다.
그것은 두려움보다 더 난해하고 딱히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마비 상태, 즉 결단력과 이성과 자유의지가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본문』 중
독재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적인 뉘앙스가 풍긴다. “신의 축복”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Kharisma’로부터 유래한 이 말은 신이라는 존재를 지우고 본인이 그 자리에 올라서서 축복을 베푸는 자가 된다.
첫째, 국가에 저항할 수 없다.
국민은 수령이 위대하다는 선전에 세뇌당했으며, 이를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가 죽었을 때도 국민은 애도했으며 이후에도 그를 그리워하는 세력이 존재했다. 마치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난 이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은 저항의 자유를 빼앗겼고, 반대할 수 있는 생각의 자유를 인정받지 못했다.
고음의 목소리와 위선자의 시선을 지녔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몸단장에 신경 쓰고 장식한 그 남자가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건 친구건 적이건 모든 도미니카 사람들에게 주문을 걸듯 행사하던 활동 불능 상태였다. 『본문』 중
둘째, 스스로 결단할 수 있는 자유를 잃었다.
쿠데타를 계획한 국방부 장관은 수령 암살이 성공했음을 알고도 제대로 마무리를 할 수 없었다. 부재한 수령이지만, 죽기 전까지 죽은 수령의 권위에 눌려 어떤 – 자신을 보호할 – 행동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란자로 잡혀 죽어가는 순간 평안을 얻을 정도였다.
“주요 음모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보고는 스스로 겁을 집어 먹었습니다. 트루히요의 시체는 거기에 있었지만. 드루히요는 계속 그들 안에 살아 있었던 것이지요.” 『본문』 중
셋째, 지식이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잃었다.
수령의 마음에 들지 않는 지식은 죽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신이 아닌 자가 모든 지식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지식인은 미래가 아닌 당장 수령의 마음에 들기 위한, 혹은 수령의 말을 뒷받침하는 지식만을 생산할 뿐이었다. 정의를 부르짖어야 할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독재자와 타협하고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 바티칸, 그리고 신부들 - 대부분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가 두려워서 계속 체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一 과 다시 다리를 놓기 위해서는 신문과 방송을 통한 비난과 비방 선전을 중단하거나 아니면 약화시켜야만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 적들은 이 정권을 반가톨릭이라고 규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본문』 중
넷째, 소유의 자유를 잃었다.
가진 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자. 그들은 잠시 갖고 있을 뿐이다. 수령의 한 마디에 빈털터리가 될 수 있다. 아내와 딸조차도 지킬 수 없었다. 수령의 위안부로 선택되면, 말없이 내어 주어야만 했다. 자신의 목숨과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팔지 말아야 할 것을 팔아야 했다. 진정한 소유의 자유를 잃었던 것이다.
부자들 역시 계속해서 부자가 되고 싶다면 수령과 한패가 되어야만 했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회사들의 일부를 그에게 팔아야 했으며, 수령의 회사들 중 일부를 사들여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부자들도 트루히요의 위대함과 권력에 공헌해야만 했다. 『본문』 중
마지막으로 생각의 자유를 잃었다.
생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아무리 앞에서는 굽신거릴지라도 머릿속에서는 욕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충분히 사상 개조가 이뤄진 국가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 학교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마도 그 시절 초등학교에 다녔던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면, 학교에 사진을 걸 수 있구나!”라고 말이다. 현재, 북한은 그렇게 하고 있다.
여전히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 딸에까지 연민을 느낀다. 그들은 이 부녀가 잘못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상모략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면, 코로나 시대에 기독교라고 자처하면서 장사하는 집단도 많다. 예배를 수금(收金)으로 생각하는 집단인데, 이러한 집단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예 없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이런 사람들의 비율이 적정 수준을 넘었을 때, 독재는 유지되고 수령이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는 무오류 하며, 천상의 인물, 철인으로 다시 탄생한다.
“아빠가 결코 진심으로 그 일을 유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수령님에게 봉사했던 탓에, 아빠는 양심의 가책이나 감성, 그리고 최소한의 청렴성과 최소한의 판단력도 상실했어요. 아빠 동료들처럼 말이에요 아마 온 나라가 그랬을지도 모르죠.” 『본문』 중
이런 소설 속의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