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한 제언(16)

교회 내 경제적 평등

by 조작가Join

한국 교회 편


교회 내 경제적 평등


교회는 경제적 평등을 원천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공유경제 시스템과 관련한 설교를 들은 적이 거의 없다. 특히, 대형 교회일수록 초대 교회의 ‘나눔’과 관련한 설교는 더 하지 않는다.

아마도 헌금을 많이 낼 것 같은 자산가들이 귀를 막을 것으로 생각해서 애당초 하지 않는다. 십의 일조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부자들에게 그 이상을 내야 한다는 설교는 교회 내의 부자들에게 선전 포고하는 것과 같다. 교회의 평등은 자발적인 모습이어야 한다. 가진 자들이 헌금 등으로 많이 기부해야 한다. 그리고 부족한 자들에게 나눠줘야만 한다.


현재 교회는 금권주의가 판친다. 『포퓰리즘의 세계화』에서는 미래 정치적 형태로 금권정치와 포퓰리즘을 주장하고 있는데, 교회도 다르지 않다. 돈 있는 자는 피라미드 조직의 꼭대기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정직한 설교를 막고, 그들의 ‘부’가 하나님의 축복임을 전하는 메시지를 촉구한다.

실제로 한국 교회가 그래 왔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성공 등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부자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를 쌓을 수 있었다면 나눔은 그 은혜를 나누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가난한 자는 게을러서 기도가 부족하고 정성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건 상한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앞에서 공유경제를 말했다. 그리고 공유경제를 활성화해서 수익을 창출하고, 그 수익으로 기본소득을 제공하자는 주장을 했다. 한국의 대부분 교회에는 부자들이 있다. 그들은 장로이며, 권사들이다. 이들이 앞서서 교회 공유경제의 기반(자원)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공유경제』에서는 공유경제 플랫폼이 설립되는 데까지 가장 어려운 부분이 자본금 마련이라고 한다. 이 부분을 교회의 부자가 헌신하는 마음으로 해결해 줘야 한다. 투자가 아니라, 교회의 청년과 경제적 공평을 위해서 부자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복음서에는 근심하며 돌아가는 부자 청년이 등장한다(이 말씀은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온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의‘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교회에 다니는 부자가 깊이 묵상하고, 되새겨야 하는 말씀이다.


정치·경제적 평등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민주화가 아무런 노력 없이 시간이 해결해 준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갈등이 있고, 그 갈등과 긴장을 해결해 나가는 가운데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 결과로 교회 내의 새로운 정치·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다. 교회 내의 정치와 경제적 평등이라는 표현이 어색하고, 난색을 보이는 성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교회는 사회를 담고 있고, 사회는 교회를 담고 있다. 완전한 구분 자체가 어렵다. 어차피 서로를 담고 있다면, 교회가 사회를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디지털 평등


위에서 언급한 평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편적 평등의 조건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교회의 중요한 계획과 관련한 회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진정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경제적 평등을 뒷받침해야 하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성경에 전혀 위배되지 않으며, 오히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잘하지 못했던 부분이어서 앞으로 개선시켜야 할 내용이다.


여기에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에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한다. 바로, ‘디지털 평등’이다.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는 국가 경제 성장에 장애가 되며, 노령층이 새로운 시대에 부적응자가 되는 가장 큰 원인이다.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스마트폰 사용법을 교육한다(두꺼운 책으로 엮어서 배포하기도 한다). 유료로 하는 곳도 있고, 무료로 진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도 수준으로 교육하는 건 한계가 있다. 그 성과로 카카오톡을 설치해서 사용하거나(카카오톡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뿌듯해하시는 분들이 꽤 많다), 간단한 게임 등을 내려받아서 여가를 보내는 인구가 조금 늘어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실제로 스마트폰 등으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피교육자는 교육 이수 이후에 배운 내용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디지털기기를 사용하는 대부분 사용자는 타일러 코웬이 『거대한 침체』에서 언급한 대로 소득을 올리는 용도로 사용하지 못한다. SNS를 훑어보고, 구글로 검색하고, 클라우드에 저장하는 방법은 아무리 해도 실질적인 소득은 없다.


최근에는 1인 방송이 부상해서 다양한 플랫폼이 생겼고, 광고를 유치할 수도 있고, 금전으로 환전할 수 있는 ‘별풍선’등이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직업으로 자리 잡았지만, 방송 BJ들 모두가 충분한 소득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영향보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더 많다(노출을 콘텐츠로 방송하는 플랫폼이 상당히 많다).


소비 도구로만 스마트기기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스마트폰 등이 사실상 가장 가까운 반려자 같은 수준으로 자리 잡은 현시점에, 기기를 원활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가족 내에서도 손주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유튜브로 찾아 줘야 하는데, 조부모들은 제대로 찾아 주지 못한다. 디지털기기를 통해 교류해야 하고, 다양한 업무를 스마트폰으로 실행해야 하는 시대에 노인들은 대책 없이 새롭게 생성된 직업 현장에서 멀어진다.

국가에서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려고 애쓰지만,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디지털기기 학습 여건을 보장해 주는 일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히 육체로 하는 일을 창출하는 것도 좋지만, 디지털기기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서 관련한 일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긍정적인 방향이다. 특히, 포스트 코로나 이후에 디디털 기기의 활용은 어느 시대보다 광범위하게 전파될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한국 교회는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예배 끝 무렵에 행해지는 축도 시간을 살펴보면, 국가, 사회, 청년, 직장, 학업 등 다양한 문제를 거론하고 축복하지만, 노인을 언급한 내용은 없다.

사회적으로 고령화 문제가 시급하고, 100세 시대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 현실을 교회에서도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노인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직면한 문제는 바로 노인 문제다. 노령층 교인들이 얼마나 현대 흐름에 잘 편승하는가에 따라 교회 내 세대 간 갈등이 해소될 수도 있고, 새로운 시대의 대안 공동체 형성 여부가 결정된다. 그래서 디지털 격차를 줄이고 디지털 평등으로 나아가도록 지원하는 건 교회 발전을 위한 기본적인 의무다.

예배 시간에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이해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통해 성경과 찬송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교인이 현재와 같이 계속 유지되면, 세대 간 격차는 절대로 봉합될 수 없다. 아직도 “경건한 예배를 위해서 휴대폰을 꺼주십시오.”라는 메시지가 강대상 위 커다란 스크린에 뜬다는 것은 교회가 늙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휴대폰의 의미는 스마트폰을 활용하지 못하는 세대를 향한 메시지다.


따라서 교회에서 디지털기기를 원활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학습 여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 디지털‘리버스 멘토링’을 실행해야 한다. 청년들이 노령층 교인들을 대상으로 교육자가 돼서 가르쳐야 한다. 청년과 노령층의 역할이 바뀌는 동시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할 수 있다.

정치·경제적 평등과 관련해서는 노령층에 대한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 교회는 청년들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중요한 교회의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청년들에게는 없다). 그러나 교회 내 정치·경제적 평등이 청년들까지 포함해서 진행돼야만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디지털 평등은 청년 세대가 노령층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차원에서 진행돼야 한다. 청년들은 설명서 없이도 디지털기기에 적응하고 활용하지만, 노령층은 그렇지 못하다. 평등은 모든 계층의 동의와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 아래 모든 사람이 동등함을 강조한 이유도 교회 공동체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 평등이 중요했음을 반증한다.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바울이 성도들의 동등함을 설득했던 서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각자 처한 환경과 위치가 달라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평등 대신 권위와 반항이 존재하게 되고, 공동체는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만다.


예배의 통합


현대의 많은 문제점의 해결방안으로 수많은 저자가 공동체를 제시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는 과거 규모와 위계서열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된 ‘조직의 힘’은 아니다. 공동체의 현대적 의미는 긴밀한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네트워크는 기본적으로 동등함을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서로 영향을 끼친다(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개인의 성향을 존중하고, 이를 토대로 공동체 구성원으로 활동하거나 보호받는다.


과거 진보주의는 보수주의의 ‘신’을 대신해서 인간의 ‘이성’을 등장시켰다. 이성의 등장은 한순간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근세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사유에서부터 칸트를 거쳐, 결국에는 프랑스혁명에까지 이어지는 역사가 있다.

인간의 진보와 그 이성의 올바름에 대한 확신은 근대와 현대를 거쳐 소멸했지만, 이성은 여전히 동물과 인간의 구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성도 집단 이성을 말하면서 공동체를 강조하기도 했고, 반대로 개인의 무한한 발전을 이상향으로 삼아서 계몽을 통한 진보에 대해 확신하기도 했다.

현대의 공동체는 개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협력을 강조하고, 혼자서 절대로 존립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정치·경제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겼던, 신자유주의 시대가 실패로 귀결되면서 평등, 포용이 새로울 것도 없이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가 부상했다.

물론, 대안으로 제시된 공동체는 훨씬 더 복잡하다. 복잡하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더 세부적으로 위계질서로 나열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교육과 관련한 부분을 보더라도 『교육 개혁』 등에서 주장하는 공동체는 지역 사회, 가정, 지역 교육기관, 학교, 학생들이 촘촘히 연결된 교육 공동체를 말한다. 즉, 교육 분야만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기관과 구성원들 모두가 연결되고 노력해야 그 성과가 나타난다.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발전을 위해서도 위와 같은 연결이 필요하다. 한 분야의 기형적인 성장과 발전으로 다른 분야가 낙수 효과를 누릴 거라는 생각은 흐르는 물과 땅에 관련한, 즉 생각하지 않는 사물에 적용되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고, 욕망이 있는 동물한테는 어림도 없는 일임을 인류는 너무나 큰 시행착오 끝에 알게 됐다.

한국 교회는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혹은 이미 끼치고 있다). 교육과 관련해서는 미션스쿨이 상당수여서 조금만 적극적으로 지역 사회와 긴밀한 협력체제를 이룬다면, 분명히 좋은 교육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아울러 복지와 관련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즐비해서 사회 복지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으며, 문화가 상대적으로 뒤처졌다고는 하나 다양한 전문가와 콘텐츠, 하드웨어 등을 활용한다면, 충분히 과거 문화 선도자 역할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의 올바른 공동체 설립이 중요하다.


나눠진 예배를 다시 회복할 때


교회가 성장하면서 모든 성도가 한 시공간에 예배드리기 어렵게 됐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부 교회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한 번에 예배드리기 힘들어진 것이다.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예배드린 적 있는데 예배당 규모가 엄청나지만, 수십만이 넘는 성도를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국 초대형 교회의 성도는 수만 명이 넘기에 어쩔 수 없이 나눠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렇다면, 초대형 수준이 아닌 교회라면 어떨까? 과거 필자가 다녔던 교회는 성인이 800명 정도 되는 교회였다(유아부부터 청소년부를 포함하면 천 명 이 다니는 교회였다). 작지 않은 교회였다. 그런데도 예배드리는 본당은 보조 의자까지 설치하면 800명이 한 번에 예배드릴 수 있었으며, 실제로 송구영신 예배, 크리스마스 감사 예배 등은 온 교인이 한 번에 예배드렸다.

그러나 평상시는 총 3부로 나눠서 예배드렸고, 2000년대 초에는 청년부 예배를 오후에 신설해서 한 번 더 예배드렸다.


예배를 나눠서 드려야 하는 경우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전 교인을 도저히 한 번에 수용할 수 없을 때 나눠서 드려야 한다. 혹은 교사, 주방 봉사 등 다양한 직분을 수행하는 교인들의 시간을 배려해서 한 번 정도 별도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을 고려해서 아침 7시부터 예배를 쪼개서 드리는 것은 결론적으로, 하나의 통합된 메시지로 공동체 마인드를 형성하는 데 장애가 된다.


각기 다른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는 같은 교회에 다니더라도 다른 메시지를 들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신앙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 공동체를 생각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더욱이 자신의 편리에 따라 예배 시간을 조정한다는 것은 예배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기본 가치와 모순된다.

과거 반바지, 샌들 착용을 금하고 주일에 매매하는 것, 결혼식 참여 등도 자제해야 한다고 말한 교역자들의 태도를 고려할 때 예배를 나눠 드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 부분은 유연하게 타협했다.


나눠진 예배는 다시 전 교인을 함께 모을 수 없게 만들었다. 청년부 예배가 새롭게 배정되고 나서 토요일에 있었던 청년부 예배와 모임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청년들은 자연스럽게 대예배라고 호칭되는 예배에 거의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나눠진 예배는 성가대원을 비롯해 직분 자의 수를 늘렸지만, 교인의 충성도가 높아졌다고 할 수는 없다. 대부분 교회 성가대는 정원을 채우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배 수를 늘리고 성가대를 늘렸으니, 각 예배에 참여하는 교인도 줄어서 성가대원도 줄 수밖에 없다.


아울러 예배 시간에 따라 참여하는 연령층도 다르다. 청년부 예배를 제외하고 이른 예배일 수록 노령층 교인이 적다. 연세가 지긋한 교인들은 11시(한국 교회 예배 시간은 거의 11시다) 예배를 선호한다.

이제 예배 수를 줄여야 한다. 그러나 교인이 줄어도 예배 수를 줄이지 못한다. 청년부 예배를 다시 통합시키려 하니 청년부가 반대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들끼리 드리는 예배가 좋은 것이다. 긴장할 필요도 없고, 청년이 주인공이길 원한다. 그들은 대예배 시간 설교를 듣기 힘들어한다. 이유는 다양한데, 대체로 자신의 정서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거 청년부가 하나의 자치회였음을 고려할 때 현재 교회의 보조를 받고 애매한 위치에서 활동하는 청년부는 오히려 퇴보했다. 이런 경향은 새로운 세대가 가세할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교인이 줄어드는 것을 원하는 교회는 단 한 군데도 없을 것이다. 기업은 구조조정을 통해 수익을 위해서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럴 수 없다. 한 명이 줄면, 그만큼 헌금이 줄기 때문이다. 물론, 영혼 구원이라는 지상 사명이 가장 크기에 교인이 줄어드는 현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예배가 통합되지 못하는 한, 한국 교회 내부의 갈등과 일부 퇴보 현상은 해결할 길이 없다. 싫어도 자주 보고, 같은 시공간을 공유해야만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각자 성향을 고려하고 편리를 위한, 쪼개진 예배는 대체로 인위적인 나눔이었지, 어쩔 수 없는 상항에서 부득이하게 진행한 상황이 아니었다.


3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회가 악수(惡手)를 둔 것이다. 이제 새로운 판이 전개된다. 새롭게 좋은 수를 두면 된다. 교인이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예배의 통합은 당연하고, 반대하는 교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될 수 있다. 이벤트성으로만 드리는 온 세대 예배를 폐하고, 역으로 이벤트로 세대별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동체를 재조 성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전 교인들이 모이는 예배에 대한 불안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오프라인 예배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교인들에게는 공동체 예배가 더 그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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