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유를 언제 생각할까?”
『염소의 축제』하(下) 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Jorge Mario Pedro Vargas Llosa)(201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페루 출신 작가가 도미니카 역사를 발췌해서 소설을 쓴 것이니 진실 논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진위만을 따지려 한다면, 소설을 읽을 이유가 있을까? 영화 《다빈치 코드》가 국내에 상영되려 했을 때, 무개념 한 기독교 단체가 반대했다는 뉴스를 접했는데, 소설에서 문장을 놓고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염소의 축제』는 독재자와 관련한 사실 여부로 비판받고 있다고 한다. 독재자를 비판했기에 지지자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다양한 생각이 공존한다는 민주주의가 실현됐다는 의미에서는 오히려 고무적인 현상이긴 한데. 우리나라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각자 다른 개인이면서 인간이라는 종으로 묶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와 『염소의 축제』는 공통점이 있다. 등장인물들 대다수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두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주술에 걸린 듯이 명령에 따라서 움직인다. 전작에서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 같은 인간이 등장해서 무한 발기가 가능했다면, 후자에서는 수령의 명령, 혹은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생각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둘 다 자발적으로 생각하기를 멈춘 것이다.
그것은 두려움보다 더 난해하고 딱히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마비 상태, 즉 결단력과 이성과 자유의지가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고음의 목소리와 위선자의 시선을 지녔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몸단장에 신경 쓰고 장식한 그 남자가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건 친구건 적이건 모든 도미니카 사람들에게 주문을 걸듯 행사하던 활동 불능 상태였다. 『본문』 중
작품은 자유를 언급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자유를 생각하게 만든다. 자유라는 걸 얻기 위해서는 많은 피가 필요하지만, 다시 그걸 잃는 건 어렵지 않다. 자유는 보이지 않는 무형이기에, 그리고 자유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쉽게 양도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 에로부의 도피』는 히틀러에게 자유를 몰아준 독일 국민이 등장한다. 국가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포기한다. 물론, 그것 또한 자유인들이 가진 자유이다. 그러나 다시 자유를 가져올 때까지 세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람이 죽어야 했다.
작가는 독재자들 비판하고, 희화화하지만 그러면서도 독재자의 노고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모두가 염소를 조국의 구원자로 떠받들었다. 그는 지방 토호 세력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고, 아이티의 재침략 위험을 종식시켰으며, 세관을 통제하고 도미니카 화폐 사용을 금지했음에도 예산 승인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과의 굴욕적인 종속을 마감시켰고, 자발적이건 강요에 의해서 건 최고 인재들을 정부에 입각시킨 사람이었다. 『본문』 중
아울러 열정이 넘치는 수령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만큼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30년 동안 이뤄 놓은 결과물에 대한 자화자찬과 함께, 이 세계를 더 유지하려는 부류들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는 누구도 믿지 못해서 자신의 가족들조차도 후임자로 여기지 않는다.
아울러 롤리타 증후군조차도 더 좋은 국가를 만들기 위한 자신의 노고에 대한 작은 위안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바로 페트로니우스와 솔로몬 왕의 요법이었다. 싱싱한 여성의 성기는 일흔 번의 봄을 보낸 노병을 회춘시키는 처방이었다. 『본문』 중
한 가정을 파탄 내고, 한 여인의 인생을 망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흔의 나이로 10대 소녀들과 잠자리를 하는 게 오히려 소녀들에게 영광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작가는 수령의 사고를 분석하지 않았다. 다만, 줄거리 속에서 등장하는 사건만으로도 수령의 독재 수준이 도를 넘어섰다는 것을 느껴지도록 서술했다. 수령이 암살당하던 밤에도 그만의 유희를 즐기러 이동하는 중이었다. 결국, 성 중독자였던 수령이 죽은 것이다.
이제 이런 수령의 사고를 조금만 분석해보자.
그의 초심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가 됐고, 이후 열정적으로 국가 재건에 경주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개발독재 시대에는 어쨌든 독재자가 초인적인 업무 능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고, 그의 정력도 시들게 되면 인간은 새로운 것보다는 현상 유지에 골몰하게 된다.
이때, 반대급부가 성장하고 결국 암살이나 쿠데타와 같은 동요가 발생한다. 물론, 이런 현상은 최후의 순간이다.
권력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결과물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돌린다. 물론, 잘한 것만 본인의 것이다. 잘못한 것은 그 부하의 몫이다. 어느덧 우상화를 시도한다. 그가 없으면, 성장은 없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스스로 굳게 한다. 이쯤 되면, 본인은 국가의 일인자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당연히 갖고 있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마음대로’라는 의미는 국가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들은 서로 동료를 제거하고, 동료보다 앞서 나가고, 수령의 관심을 더 많이 받고, 수령의 농담은 더 가까운 곳에서 들으려고 안달했다. 사랑받기 위해 안달하는 후궁 계집년들 같아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이 한순간도 방심하지 못하도록,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상투성과 지루함에 빠지지 않도록 그는 번갈아 한 사람씩 승진시키면서 다른 한 사람을 망신시켰다. 『본문』 중
주인이 자신의 물건이나 종을 마음대로 한다는 데 문제가 있을까?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게 없다. 왜냐하면, ‘내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자는 국가의 어려움을 심각하게 걱정한다. 이유는 국가가 ‘내 재산’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의 여자, 어린 소녀, 남의 물건 따위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와 같이 잠자리한 여자들은 성은(聖恩)을 입은 것이다.
이제 독재자는 잃을 게 너무 많다. 잠자리를 같이하지 못한 한 소녀가 출국했을 때, 그는 출국 조치자를 찾는다. 감히 누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내보냈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성기를 발기시키지 못한 책임을 소녀에게 넘겨야 하는데 그 오점을 남긴 아이가 사라졌으니, 독재자 처지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년이 잘못한 거야. 그러니 그년을 죽여야 한다고!”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다.
자유가 범람한 세상인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을 향해 욕을 해도 잡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근 정인이 사건과 관련한 대통령의 발언도 무분별한 자유에 힘입은 듯하다. 마르크스를 읽어도 불온서적을 읽었다고 하지 않는다. 과거와 달리 성적 욕망을 충족한다고 해도 큰 비판을 받지 않는다. 이혼율이 상당한 수준이어서 이제 이혼도 흠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생각의 자유가 있고, 육체(성)의 자유가 있고, 가족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만의 자유가 넘치는 세상이다.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측면을 완전히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자유의 고갈 시대에 살고 있다.
생각할 자유가 있으나, 우리의 사고는 선택지가 이분법적이어서(특히 정치와 관련해서)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없다. 육체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성의 권익이 신장하고 있고, 성소수자가 조금씩 권력을 쟁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젠더의 자유는 보이는 것일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성(sexuality) 중독이 되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의 25% 이상은 포르노 사이트이며, 이 중에는 리벤지를 목적으로 한 영상도 제재 없이 게재된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자유도 따져보자. 가족으로부터의 자유, 즉 ‘꼰대’로부터의 자유일 수도 있다. 부모에게서 독립한 개인의 자유, 칭찬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채 살아간 사람들에게 이혼의 증가는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찾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이혼은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방을 만들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버자이너 울프의 ‘방’은 자유의 억압을 의미한다면, 지금 ‘방’은 자유가 아니라, 자신만의 경계석을 세워서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어울리려 하지 않는 폐쇄성을 상징한다. 이런 자유를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스스로 족쇄를 채운 것과 다를 바 없다.
SNS에서 수천, 수만 명의 팔로우를 거느리고 ‘일거수일투족’이 이슈가 되는 연예인들을 보자. 그들의 삶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러다가 줄어드는 ‘좋아요’에 울고, 떨어져 나가는 팔로우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들은 자처해서 자신만을 감시하는 수많은 CCTV를 설치한 꼴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은 이런 모습을 동경한다.
독재 시대가 아니다. 그 증거로 거리에 독재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어도 바로 떼어가지 않는다. 물론, 대통령은 국가가 자신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독재자 수준은 아닐 것이다. 그래 봤자, 5년 동안이다.
분명, 자유가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 자유를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체로 자신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개인의 자유라고 우기고, 자유라고 하면서 남을 해 하려 한다. 악플이 그렇고, ~카더라가 그렇다. 코로나 시대 교회들의 모습도 자유를 주장한다. 단, 그들만의 자유를 말이다. 파쇼적인 성격이 짙은 목사들의 종교의 자유에 대한 부르짖음은 뭔가 어색하다. 독재자가 더 독재할 수 있도록 만든 유신헌법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준이 있다고 말한다. 제목과 모순적인 말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유를 제한하자는 게 아니라 자유를 잘 누릴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도미니카 국민들이 지난 31년 동안 경험했던 수령과의 신비주의적 공존 개념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학생들과 ‘시민연대’, 그리고 '6월 14일 운동’이 소집한 길거리 모임은 처음에는 소수만이 두려움 속에서 참가했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이 흐르자 참가자의 수는 수십 배로 늘어났다. 『본문』 중
독재자가 죽었다. 만약 그가 철인이었다면, 국가는 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는 어떻게든 유지된다. 작품 속 도미니카가 살아남았듯 대한민국도 살아남았다. 아무리 위대해도 독재자는 사라져야만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자신만의 방을 만들더라도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문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