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공유경제(5)
세계 교회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대부분 교회는 당시 시대적 흐름에 잘 참여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로마 시대부터 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약자 편에 서 있었던 적이 별로 없다. 일부만 기독교 정신을 지켰을 뿐이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선교사들도 정치와 결탁한 흔적이 꽤 있으며, 그 혜택으로 기독교가 조선에 유입돼 전파될 수 있었다(그 예로 광혜원 설립을 들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대부분 교회가 신사 참배에 참여했고, 군부독재 시대에도 대규모 구국 기도회를 열어서 독재자들을 후원했다(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史』를 보면, 당시 방위들이 구국 기도회에 참여하면 출석으로 인정해줬다는 기록이 있다) 그 대가로 교회는 성장했다. 비교적 부정적인 내용이지만, 기독교 불모지에 정착하고 뿌리내리는 고육지책이었을지도 모른다(니얼 퍼거슨은 미국은 정교분리가 원칙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유럽과 비교했을 때 그런 수준이지, 현재까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히려 이를 부인한다면, 어떤 증거를 댈 수 있을까?).
알렌은 민영환을 우연히 치료해서 기독교를 전할 수 있었고, 양반들의 지지를 얻었다. 신사 참배는 분명 우상숭배의 형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일제의 박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타협일 수도 있다(부정적으로 보면, 그저 권력에 결탁한 자기 긍정이었을 수도 있다).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지지도 기독교 자체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기에 당시, 반공 사상을 핵심 기치로 건 정권을 지지한 건 당연지사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기독교와 공산주의와의 갈등, 특히 국내의 갈등은 1920년대부터 계속됐던 부분이다).
물론, 어쩔 수 없다고 과오를 그대로 수용하자는 건 아니다. 당연히 그릇된 행동은 회개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기에 도덕성 회복이 힘든 것이다.(물론,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기독교 집회에서 회개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한다. 그러나 회개 기도한다고 해서 끝일까? 변화가 없으면,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생존과 성장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이제, 그 적응력을 다시 발휘해 보자. 정보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서 허우적댔던 모습을 던져 버리고 온전하게 적응해 보자. 어차피 공유경제라는 바닷속에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밖에 없고, 결국 교회도 파도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이왕에 참여할 바에는 수동적으로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낫지 않을까?
현재 공유경제와 관련한 사업을 추진한다면 다양한 혜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확보된 콘텐츠와 회원, 플랫폼, 수많은 기존 성도의 신뢰는 다른 사회적 플랫폼이 단기간에 달성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전 세계 기독교 인구가 21억 명을 넘는다고 한다. 규모만 볼 때 어떤 국가도(중국을 포함해도), 어떤 SNS 플랫폼도(페이스북 조차도) 기독교 규모를 넘어설 수 없다. 아울러 중국이나 페이스북보다 교회가 탁월한 부분이 있는데,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로 민주주의적이지 않기에 개인의 능력 발휘와 동기부여가 크지 않다. 그리고 페이스북과 비교했을 때도 페이스북은 온라인 회원을 의미하지만, 교회는 오프라인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성도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신뢰도 부분에 있어서 훨씬 크다.
이미 주어진 조건이 좋은 데 이를 활용하지 않고, 가만히 묻어두는 건 신약에 나오는 어리석은 종 -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그대로 가져온 종 - 과 다를 바 없다. 이미 교회 운영은 기업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회계 부분에 있어서 부정축재, 비리 등이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영리 사업을 투명하게 하는 게 교회 이미지를 개선하는 방법이며, 공기관의 역할을 감당하는 길이다.
공유경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적인 경제방식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공유경제는 영어로 ‘Sharing Economy’로 표기되기도 하고(대체로 ‘Sharing Economy’로 표기한다), 혹은 ‘Peer Economy’를 사용하기도 한다(물론 더 다양한 표기법이 있다).
둘 다 한글 번역은 ‘공유경제’로 하고 있는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전자는 ‘나눔’에 방점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면, 후자는 상호 간의 연결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P2P(peer to peer; person-to-person ((개인 대 개인 파일 공유 기술 및 행위))의 활성화가 오래됐기 때문에 그 해석이 기술적일 수 있다. 반면에 전자는 후자보다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공유경제는 기술적으로 개인과 개인을 연결한다. 즉, 매칭을 통해 발생하는 수수료가 현재 대표적인 공유경제 플랫폼 기업들의 수입이 된다. 페이스북은 친구를 맺어주는 방식으로 매칭 하고, 카카오톡 등도 메시지를 송수신하는 방법으로 개인을 연결해주는 매칭 플랫폼이다. 에어비앤비는 개인과 개인의 숙소를 매칭하고 있으며, 우버는 교통수단을 매칭 한다. 이러한 매칭 방식은 ‘Peer Economy’에 가깝다.
다음으로 공유경제는 소유물을 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원래 ‘나눔’의 의미는 무료(Free)의 의미가 강하다. ‘음식을 나눈다.’, ‘물품을 나눈다.’ 등의 의미를 살펴보면, 대가성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유경제 자체가 성경적 의미로 해석하면 필요한 만큼 나누어 쓴다는 것이다. 이때 나누는 것에 대한 대가는 없다. 그러나 현재 공유경제는 자본주의와 결합으로 수익을 위한 경제행위라는 의미가 강하다. 공유경제와 관련한 대부분 책이 ‘수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억지로 의미를 추가하기 위해서 환경을 언급하기도 하고, 공유경제의 이득 등을 언급하지만, ‘승자독식’을 폐해로 보고 있지 않다. 그저 더 성장하고, 더 큰 부의 축적 방법들을 제시할 뿐이다.
교회의 공유경제 방법은 사회와 달라야 한다. 막스 베버가 말한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결합도 기독교 정신으로 미국식 자본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그만의 독자적인 도구였을 뿐 정통적인 기독교 메시지와는 다르다. 베버의 노력과 학자로서의 위대함을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그는 기독교와 자본의 역사 중 빙산의 일각만을 참고해서 저술했을 뿐이다.
교회의 공유경제는 구약에 나오는 ‘희년’과 신약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나눔’과 일치해야 한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눔이 보장되는 수익 활동은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 적어도 자본주의 시스템을 인정하고, 그 시스템이 왜곡되지 않는 한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교회는 온전한 자본주의 방식으로, 그리고 온전한 분배 방식으로 공유경제를 실행해야 한다.
교회는 앞서서 제시한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미 존재한 자원을 십분 활용해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선도하고 투명한 재정 운영으로 경제적 신뢰를 확립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로비, 착취, 지대 등을 통한 비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도 합리적인 방법으로 공유경제를 이끌어 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게 수익에 대한 분배이다.
공유경제 사업과 관련해서 대상은 교인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 문화를 잘 알고,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확립된 자들이 먼저 실행해야, 교회의 특성을 반영한 공유경제를 실행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해서, 일자리를 구하는 교인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 이런 부분은 기도와 믿음으로 구직을 후원하려는 교회의 수동적인 방법에서 실질적인 방법이다(기도만 한다고 해서 모든 게 이뤄지는 게 아니다. 기도와 더불어서 실천이 있어야 한다. 코로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기도회가 있지만, 코로나는 창궐했다. 오히려 기도와 더불어 모임을 덜 갖고, 온라인 예배에 열심이었더라면 코로나 교회라는 불명예는 피했을 것이다).
다음은 사업 진행에 관련한 부분이다. 앞에서도 제시했지만, 사업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잘 되는 사업은 계속 발전시키되, 그렇지 못한 사업은 빨리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폐업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실직자들에게는 다른 기회를 주어야 한다. 즉, 다른 창업 기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실패자에 낙인찍는 부정적인 한국 문화는 그들의 재기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교회는 실패도 용납하고 그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구약에서 3대 인물로 꼽히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도 실패가 있었으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고, 신약에서도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도 순교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실패에 대한 용납이 있었고,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기회가 부여될 때는 엄정한 절차를 통해 기회가 부여돼야 한다. 대체로 큰 교회의 사업은 교회 직분 자의 자녀들을 고용하는 게 대부분이다. 교인 고용이 잘 못 됐다는 게 아니라 선발할 때 부모와 상관없는 공정한 선발이 이뤄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수익과 관련한 부분이다. 교회 공유경제가 꽤 활성화되고 수익이 발생한다는 전제조건하에서 수익은 철저히 분배돼야 한다. 대부분 교회는 교회 내 교인보다는 외부 불우이웃을 대상으로 자선을 베푼다. 그런데, 자선과는 별도로 교회 내 처지가 어려운 교인들을 대상으로 기본소득을 분배해야 한다.
수익 배분 방식은 현금이다. 이들이 경제활동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교회가 지원해야 한다. 물론, 우선순위는 가장 어려운 계층에서부터 축차적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금액은 수익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원대상 숫자에 연연하는 지원은 지양해야 한다. 오히려 지원금으로 정상적인 수준으로 경제활동이 가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지원대상의 숫자를 늘리는 것은 지원금 자체가 무의미한 소비 활동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예를 들면, 흡연과 음주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상징적인 숫자 1,000명, 10,000명 등을 통한 과시가 아니라 확실히 경제적 주체로 설 수 있는 한 명, 열 명을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표현으로 ‘교회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많은 국가와 도시에서 기본소득을 통한 긍정적인 피드백이 나오고 있다. 한국 사회는 선택적 복지, 보편적 복지 등 복지 분야의 확대에 대한 논쟁이 큰데, 이런 논쟁을 한국 교회가 나서서 기본소득을 제공함으로써 마침표 찍도록 해야 한다.
기존 공유경제 플랫폼의 문제로 지적되는 ‘승자독식’ 문제를 수익을 기본소득으로 환원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0.1%의 억만장자가 있고, 99.9%의 빈곤층이 있는 사회와 100%의 중간소득계층이 있는 사회의 평균은 같다. 수치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삶의 조건과 행복 등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큰 차이가 있다. 대부분 사회는 인간의 생명 존중권과 행복추구권과 관련해서는 보편적 보장을 전제하고 있다(물론, 세부적인 내용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교회의 가치관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교회는 인간의 기본권을 위해 발생한 수익을 활용해야 한다. 공유경제 활동으로 나오는 수익으로 교회를 증축하고, 비자금을 조성하는 등의 용도에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익은 철저하게 기본 소득으로 환원할 필요가 있다.
교회 헌금은 이미 목회자들을 위한 사례로 사용되고 있으며, 교회 증축 등을 위한 자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공유경제로 인한 수입은 소외계층의 기본소득으로 사용해서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구약에서 나오는 희년은 새로운 기회라는 의미가 있다. 일정 기간 재산을 모두 잃고 타인의 노예로 살았다 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잃었던 토지를 다시 찾게 된다. 이런 경우 노예를 잃고, 토지를 반환해야 하는 주인 입장은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엄격히 따져보면, 노예와 획득한 토지를 통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원주인이 다시 시작할수록 돌려주는 게 공동체 유지에 좋다. 그리고 구약의 희년은 50년 되는 해가 되기에 그 시대로 따지면, 주인이나 노예나 모두 평생이라는 시간이기에 절대로 짧은 기간이 아니다. 현대 변화 속도로 희년을 지킨다면, 몇 세대와 같은 기간이어서 ‘회복’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생각하면, 희년은 기회를 준다는 자비의 개념으로 생색내기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신약은 희년보다 탕자를 비유로 든다.
하나님은 실수한 자녀라 해서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죄를 용납하시지도 않는다. 예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균형을 명확히 보여준 사건 아닌가?
신약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나눔’은 대가 없는 나눔이라는 공평성을 강조한다. 가진 자가 내어놓은 재산으로 가난한 자들이 생활한다. 모든 구성원이 기본소득을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나눔은 디아스포라 교회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다. 현대판 공유경제를 통해서 나오는 수익을 성도와 그 외에 지원받아야 할 대상들과 나눠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원리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현대 사회에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공평한 경제행위이며, 자선이다. 도덕적으로 추락하고 사회적 신뢰를 잃은 개신교는 공유경제 활성화와 그 수익 배분으로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는 실질적인 기관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