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으로 보는 세상"(5)

"행복은 인간을 위한 것"

by 조작가Join

『저지대』헤르타 뮐러(Herta Muller) (200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독특한 언어로 이뤄진 작품


헤르타 뮐러의 작품은 단어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오해하기 딱 좋은 작품이다. 그녀가 만든 언어는 쉽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익숙한 언어가 아니니 잠시 눈으로 훑으면 곧 머릿속에서는 사라진다.

일반적인 뜻과 다른 경우도 있고, 새로운 언어로 소설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작가의 언어는 차갑다. 찬 듯이 뜨거운 느낌이다. 징그러운 찬피 동물 같다(개인적으로 찬피 동물에 대한 느낌이니 오해가 없기를).

문장은 길지 않은데, 읽기가 쉽지 않다. 원래 문장은 짧을수록 이해하기 어렵다. 수수께끼 같은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를 문장 안에 숨겨 놓는다. 덕분에 주제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스토리를 정리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잘 읽으면 이야기를 느낄 수 있다.


아름다움이 없는 풍경


작품의 풍경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저지대” 자체가 낯선 곳이다. 벌레도 많고, 날짐승도 많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날 것이다. 그들은 옷을 입었지만, 야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아이는 늘 줘 터지고, 울면 더 맞는다. 아이는 늘 욕을 얻어먹고, 한마디도 할 수 없다. 아빠도 때리고, 엄마도 때린다. 그리고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때리고 욕한다.


어머니는 내가 이제 울만큼 울었다고 말했다. 그러니 당장 울음을 그치고 공손한 얼굴로 대화에 응하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절대 부모에게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되었다. 부모가 무슨 일을 하든 아이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괜히 내가 따귀 맞을 짓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했다. 『본문』 중


아버지는 이모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 불륜을 엄마가 알아채도 어쩔 수 없다. 동유럽의 가부장적인 사회는 우리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 자체의 배경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 아니다. 그렇게 묘사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작가는 생생하게 날 것만을 표현했다. 숨기지 않았고, 포장하지 않았다. 아울러 주제도 명확하지 않다. 억지로 주제를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이 그런 거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현재를 과거와 절대적으로 비교하면 좋아진 세상이다. 과거에는 황제도 가질 수 없었던 스마트폰을 가졌고, 과거 어떤 시대보다 다양한 콘텐츠를 누리며 살아간다. 물론, 대부분 정크 정보가 대부분이지만. 편리와 풍요로운 세상이지만, 인간이 살만한 세상은 아닐 때도 있다. 특히, 도시는 말이다.


나중에 도시로 나가 살면서. 나는 거리에서 생명이 서서히 꺼져가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이 아스팔트 위에 나동그라져 부르르 떨며 신음하는데도 누구 하나 돌봐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가와 그의 손이 뻣뻣해지기 전에 반지와 시계를 빼갔다. 여자들의 목에서 금목걸이를 잡아채 가고 귀에서 귀고리를 떼갔다. 귓불이 떨어져 나갔고 피는 금방 멎었다. 『본문』 중


긍정론자들은 평등의 실현을 주장하고, 인간이 곧 신이라는 ‘호모 데우스’를 말하기도 한다. 성급한 예견이지만, 죽음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거의 유토피아와 같은 미래를 전망한다.

그러나 이런 긍정론과는 반대로 험악한 사회를 그려보는 사람도 있다. ‘승자독식’으로 인한 불평등은 점점 심해지고, ‘빅 브라더’, ‘빅 마마’, ‘빅 파더’까지 등장해서 개인을 통제하는 세상을 예측한다. 영화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와 같은 디스토피아를 주장한다.


아버지가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의 얼굴이 식탁으로 떨어진다. 제기랄, 우리는 행복한 가족이다. 제기랄, 행복이 순무 냄비 안에서 수증기가 되어 증발한다. 제기랄, 증기가 이따금 우리 머리를 물어뜯는다. 행복이 이따금 우리 머리를 물어뜯는다. 제기랄. 행복이 우리 삶을 먹어 치운다. 『본문』 중


행복을 위해 산다. 인간을 위해 행복이 있는 게 아니다. 누구를 위한 문명이고, 누구를 위한 편리인가? “저지대”는 도시가 아니다. 그래서 갖춰지지 않은 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단, 도시는 감춰져 있다. 무표정한 얼굴에 마음은 야수 같다.


“저지대”는 우리가 살았던 세상, 그리고 현재다


작품은 시기적으로 전후에서 20세기 말까지를 다룬다. 벌써 30년 전도 더 된 이야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등장인물들의 삶의 이야기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고 읽어도,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삶은 ‘도진개진’이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그 작은 차이가 ‘나’와 ‘너’를 구분해서 죽이고, 억압하고, 폭력을 가져온다.


이런 차이는 여전히 갈등과 계급을 만든다. 작품 속에서 독일과 러시아가 대치돼 있다. 한반도는 남북이 대치한다. 대한민국은 영호남이 나뉘어 있고, 서울은 강남과 나머지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이런 나눔은 모든 지방에 유사하게 전파됐다. 대구에서는 수성구와 나머지로 돼 있듯이.


이번 시간에 독일 팀이었던 학생은 다음 시간에는 러시아 팀에 들어가야 한다. 이번 시간에 러시아 팀이었던 학생은 다음 시간에는 독일 팀에 들어갈 수 있다. 때로는 교사가 학생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해 러시아 팀의 인원수를 채우지 못할 때도 있다. 교사는 다른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으면. 학생들 모두 독일인이라고 선언하고 경기를 시작한다. 그러면 학생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센 팀과 슈바벤 팀으로 나눈다. 『본문』 중


작가는 이런 현실을 당연히 부정적으로 본다. 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왜 인간은 그렇게도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일까?


모두들 이곳으로 멀리 떠나오면서 개구리를 한 마리씩 가져왔다. 그들은 이 땅에 존재하게 된 후로 자기들이 독일인이라고 자랑하면서 자기들의 개구리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들이 말하길 거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마을은 어디서나 끝이 있기 마련이다. 마을의 진짜 끝은 묘지이다. 『본문』 중


죽으면 모두 똑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사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어차피 죽을 거 왜 사냐?”라는 니힐리즘에 빠진다.

오래된 이야기를 읽으면 그 시절의 낙후함이 느껴지지만, 인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도 애쓰면 살아갈까? 행복을 위한 인간의 삶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행복이 맞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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