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전쟁의 배움터야 ”
『저지대』하(下) 헤르타 뮐러(Herta Muller) (200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작가의 비판의식이 담긴 ‘장’이다. 다른 작품에서는 더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고 하는데, 본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그 뒤에 어색한 글을 실었다. “불치만 씨”는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마음의 소리일 수도 있다. 현실을 희화화하면서 적절히 비판한다.
불치만 씨는 제2차 세계대전 시절을 되돌아본다. 그때만 해도 시간이라는 게 있었지. 불치만 씨는 말한다. 그때만 해도 누구든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았거든. 그때는 누구든 숨만 꼴 까닥 넘어가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실컷 살았다니까. 그때는 누구든 목숨을 걸고 살았어. 그때는 닥치는 대로 하루하루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본문』 중
과거에 우리 사회도 그랬다. 정의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 정의가 실현되면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정의 위에는 또 다른 정의가 있어서 계속 정의를 갈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그 사실은 과거가 돼 버렸다.
사실, 현재를 사는 사람이 본인이 사는 현실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은 어렵다. 대부분은 그냥 그럭저럭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게 인생이지.”라고 체념한다. 대부분 체념하기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는 게 아니지만, 과거에는 ‘신의 아들’이 존재했고 현재는 ‘금수저’가 버젓이 놓여있다.
불치만 씨는 말한다. 너무 미련해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도 많았지. 자신들이 얼마나 격동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거든.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어. 융통성이 없었지. 불치만 씨는 말한다. 그들은 그런 시대에는 뭔가를 하든 안 하든 생사를 걸어야 한다는 걸 도대체 깨닫지 못했어. 처음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러고 나서도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러고 나서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 『본문』 중
우리는 불만을 일삼는 사람한테 “왜 그렇게 불만이 많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라는 말을 던진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을 권한다. 그러나 불만 없이는 분노가 생기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속에는 현실 수긍이 담겨있다. 그러나 분노 없이는 움직임이 생길 수 없다. 그런 분노의 행동이 독립운동이었고, 민주화 운동이었다. 그런 움직임이 있어서 우리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세대와 알지 못하는 세대가 공존해서 살아가고 있다.
민주화 이후, 우리는 어떤 불평을 했고, 분노로 움직였는가? 촛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촛불은 전 정권을 태웠는지 몰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정권을 일으켰다. 그리고 현재는 “그래도 전보다 낫잖아?”라고 스스로 반문하면서 움직이지 않는다. 최근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미안하다”라는 글이 이슈가 됐다. 현 정권과 전 정권을 비교한 글이다.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게 핵심이다. 바뀌어도 다를 게 없다면, 뭘 해야 할까?
대다수는 그렇게 오늘을 어제처럼 산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는 오늘만 같기를 바란다. 과거에 대한 향수(鄕愁)도 없고,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다. 그냥 오늘만 같으면 된다. 그러나 역사는 오늘이 과거가 된다. 그리고 미래에서 오늘은 퇴보라는 사실을 왜 모를까?
좌우를 살피지 않고 그저 결사적으로 앞만 똑바로 보았지. 그리고 총을 쏘았지, 총에 맞아 죽기 전에 먼저 세 방을 쏘았어. 불치만 씨는 말한다. 동지애고 나발. 『본문』 중
기대할 게 없으면 포기하게 된다. 낙심은 포기의 원인이기도 하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떨어지지 않는 잎새의 생명력을 그려냈다. 강한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잎새는 죽음 앞에 낙심한 소년을 살린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잎새를 그린 화가를 죽인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하다. 그렇게 독립을 했고, 민주화를 이뤘다. 이제 새로운 변화를 위해서는 또 다른 죽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는 죽을 명분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죽은 이유는 행복하지 못해서, 혹은 돈이 없어서이다. ‘독립’도 아니고 ‘독재 타도’도 아니다. 촛불 속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래서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몇몇 무리의 기쁨조가 되기 위해서 그들의 당선을 축하하기 위한 조명 역할만 한 것이다.
시선을 미국으로 돌려보자. 트럼프는 패배했다. 그러나 그의 장사꾼 마인드는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계속 부정하면서 최대한 이익을 챙기려는 수법이다. 바이든은 트럼프와 다른 생각이다. 그는 이런 사람도 끌어안으려 한다.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마음을 트럼프는 십분 활용한다. 최대한 저항하면서 새로운 당선자를 답답하게 만든다.
역시 미국도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당선자를 맞이했더라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한 사람의 독재자가 실각했고, 또다시 마피아가 누군가를 살해했고, 테러리스트 하나는 이탈리아에서 사경을 헤맨다. 『본문』 중
누군가 죽고, 새로운 사람이 등장한다. 그러나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도 미국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모든 세상이 비슷한지도 모른다. 과거와 비교하면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살아가게 된다. 과거의 추억은 오늘을 살게 하는 자극제일 수 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내일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알코올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
아가씨야, 술로는 두려움을 이길 수 없다. 잡동사니와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여자들처럼 너도 이 잔을 홀짝거리는구나. 그 어떤 잡동사니에도. 심지어 제 잡동사니에도 적응하지 못한 여자들처럼. 『본문』 중
작가는 여성을 빗대서 말했지만, 요즘은 모든 사람이다. 아니, 99% 이상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1%의 사람도 고민이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나머지 99%를 위한 고민을 얼마나 할까? 1%에 속한 부류는 당연히 0.1%라는 미래를 꿈꾸며 오늘을 살아가지 않을까? 나머지 99%는 기대보다는 현실 수긍으로 귀착할 것이다.
“전쟁은 인생의 배움터야. 불치만 씨는 말한다.” 이 말을 좀 바꾸려 한다. “인생은 전쟁의 배움터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