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하지 못한 자”
『조서』르 클레지오(Jean Marie Gustave Le Clezio) (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은 대부분 작가적 재능이 풍부한 사람이다. 그러나 천재라고 할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서』는 작가가 20대 초반에 출간한 작품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30대 초반에 처음 접했다. 두껍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쉽게 읽을 수 없었다. 솔직히 예술적인 점수를 주자면 후하게 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다만, 23세의 청년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한 작품이다.
다 읽고 나서도 현실과 생각의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사실, 그렇게 경계를 긋는다는 게 의미 없는 작품이다. 도대체 주인공은 왜 거리를 방황했는지, 아니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끝까지 읽고 나서도 그가 정신병자인지, 정신병원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끔찍한 일들을 이리저리 짜 맞추어 보아도 그가 정신병원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군대에서 탈영했는지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본문』 중
작품에는 니체의 사상, 그리고 실존주의 사상이 버무려져 있다.
사람들은 영원하고, 신은 죽음이었다. 사람들은 영원하고 신은 죽음이었다. 사람들은 영원하고 신은 죽음이었다. 『본문』 중
파르메니데스가 생각나는군. 그 구절 알지? 그가 이렇게 말한 것 같은데, “존재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존재하게 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만일 생겨났다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언젠가 존재하도록 되어있다면 그 또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원은 꺼져버린 것이고 소멸은 조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문』 중
작가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이런 사상들을 충분히 이해했을까? 작품에 담겨있는 사상의 무게는 충분한가? 솔직히 이해나 무게감은 다소 떨어진다. 산만하고 정돈돼 있지 못하다. 자기 분열적인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소설을 이끌고 가는 큰 줄기도 명확하지 못하다. 그래서 소설은 어렵고, 매력적이다. 완성형이 아닌, 성장형 소설이라는 의미에서 『조서』는 작가의 훌륭한 처녀작이다.
소설은 1963년에 출간됐다. 세계 대전이 끝나고 냉전 시대였다. 유럽의 분위기는 소용돌이 같았다. 전후 처리가 어느 정도 정리됐으나, 유럽은 나뉘어 있었고 실존주의자들도 조금씩 사라져 가는 시점이었다.
구세대와 신세대를 굳이 나누자면, 이들의 첨예한 갈등이 번져가고 있었다. 60년대 후반에 이르면 새로운 혁명의 기운이 체제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전쟁은 어쨌든 아군가 적군을 구분한다. 그리고 내가 속한 편이 바로 정의고, 다른 편은 악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서구는 어떤 편도 정의가 아니었다. 이미 전범 국가라는 악을 소탕한 상황에서 이제는 선이라고 자처했던 국가들의 경합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십억의 남녀들이 물건을 만들어내고 폭탄을 마련하고 우주를 정복하기 위해 함께 일을 꾸미고 있다. 『본문』 중
가공할만한 핵 실험이 계속 진행됐고, 강대국의 대리전 –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등 - 이 다른 국가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치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인은 체제 순응자들이었을 것이다.
전쟁만큼 사람들이 더 쉽게 익숙해지는 것도 없지. 전쟁, 그건 없어. 매일같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고? 전쟁은 전부가 아니면 무야. 전쟁, 그건 전체적이고 영원한 것이지. 나, 아담은 결국 전쟁 중이야. 난 빠져나갈 수가 없어. 『본문』 중
이제 ‘편 가르기’가 어렵다. 내가 속한 부류가 정의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런 공황 상태에서 주인공은 탈영을 결심한다. 혹은 탈출 인지도 모른다.
도망자의 삶은 숨어서 지내야만 한다. 떳떳하게 삶을 드러낼 수 없다. 그렇게 하면, 바로 자유를 박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망자이기에 자유는 없다. 물리적인 자유도 일반인과 다르고, 그 마음은 갇혀 있을 때보다 더 갑갑할 것이다.
너 정말 미쳤군. 아니면 뭐야? 미셀! 너 몰라? 모르느냐고? 탈영병 아담 폴로가 아무것도 아닌 고발에도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본문』 중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규범으로부터의 탈출은 개인에게 정당한 방법이다. 그러나 집단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일탈 행동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탈은 정의가 아니라, 불의가 된다. “왜 너만 그래?”라는 비난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최근에 스티브 유의 반항이 있었다. 본인의 입국을 막는 법이 제안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하게 항변한 것이다. “왜 나만?”이라는 발악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과거에 호언장담하지 말았어야 했다. 적당하게 대처했더라면, 당장 손해는 봤더라도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스티브 유의 처사는 참 안타깝다. 그러나 집단의 힘,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일탈은 언제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차라리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았더라면, 언젠가 소리 없이 들어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작품은 사물도 평범하게 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른 주인공의 시각으로 묘사된다. 두서없이 전개되는 그의 설명과 사고의 흐름을 잘 따라가기 힘들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의 시선은 어둡다. 밝은 곳에서 뭔가를 설명하기보다는 어둠 속에서 설명하기를 즐긴다. 어둠 속에서 그의 사고는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우주로 향한다. 일종의 과대망상이다.
사람들은 우주의 고정된 단 하나의 점에 도달했고, 이제는 거의 영원하다. 말하자면 하나의 신이다. 왜냐하면, 존재해야 할 필요도 없고 또 창조되었어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본문』 중
광장에서 선지자 노릇을 하다가, 어느 순간 깨어보니 정신병원에 들어와 있다. 본인은 한 3일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의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정신병원에서 시작한 이야기였음을 암시한다. 물론, 이런 암시도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주인공과 의사들의 대결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 지적인 정신병자를 상대로 의사들은 경험을 쌓지만, 치료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환자 유형을 파악하는데, 교과서적인 내용을 따를 뿐이다. 독자들은 아마도 주인공이 더 똑똑하고, 정상이라고 생각할 듯하다.
이 환자는 끊임없는 우울증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는 착란이나 심지어 극심한 착란 성 정신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이 사람과 같은 경우 논리 정연한 방식으로 발작이 일어나는 데, 이는 환자의 잠재적인 지적 능력, 문화적 소양에 대한 무의지적 기억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빈번한 일탈, 좌절, 우울한 상태, 특히 허언증, 착란과 성적 강박의 여러 단계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본문』 중
세상에는 이미 분열된 자아들이 가득하다.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병원은 지을 수 없다. 결국, 분열된 자아들이 있는 이 세상이 병원인 셈이다. 정신병원은 이들에게 계속해서 표준의 잣대를 들이미는 지배자들의 억압을 상징한다. 표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 편이 아니라는 의미도 되고, 우리한테 속하지 않으면 적으로 몰리기도 한다.
우리 사회를 보자. 서로 다른 척하는 두 개의 정당이 있다. 늘 강조하지만, 이들의 차이는 여전히 ‘0’ 하나 차이다(국민의 힘과 민주당의 재산을 의미한다). 둘 다 일반 시민들이 봤을 때는 먹고살만한 사람들이다. ‘코로나 19’ 시대에 이들이 파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이들이 책임졌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 ‘기본소득’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들은 대다수 반대했다. 둘이 다르다면, 찬반 토론 정도는 있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이들은 별로 차이도 없으면서,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국민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한 장관이 사의를 표명했더니, 이를 유임하라는 국민청원이 수십만이다. 적극적인 소수에 의해서 침묵하는 다수의 의견은 반영되지 못한다.
여전히 교회는 코로나 전염병의 온상지다. 좀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터졌다. 크리스마스 등이 핑계다. 아기 예수가 탄생했으니, 일단 축하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었나 보다. 성경에 등장하는 아기 예수는 정상적인 시설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그의 등이 경험한 침상은 말 구유였다. 그리고 그의 삶은 축하받기 위한 삶이 아니었다.
코로나 시대에는 새로운 크리스마스 표준이 있어야 했다. 일시적이나마, 변칙된 기준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종교는 이런 변화를 불 경건함으로 여긴다. 그들이 일상에서 저지르는 행동들에 대해서는 합리화하면서 왜 이 시공간에 필요한 변화는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세상의 표준, 종교의 표준 등은 변화를 갈망하는 시대를 정신병동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야만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들에게 명분이 생기며, 종교를 유지할 힘을 잃어버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