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상 읽기 : 1부 4차 산업혁명과 국가(17)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

by 조작가Join

그저, 디지털 소비자

대부분 우리 부모님 세대는 4차 산업혁명의 흐름에 잘 적응하지 못하실 것이다. 그저 그 아래 세대가 챙겨주는 새로운 기술과 국가에서 제공해주는 복지혜택들을 챙기면서 최대한 수동적으로 여생을 보내실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청소년기를 스마트폰과 친밀하게 지내는 세대 이른바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 세대는 어떨까?

지금 상태라면,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상품에 잘 적응하고 최대한 능력을 발휘해서 새로운 디바이스를 다룰 것이다. 소비자 혹은 사용자로서 한국인은 우수하다. 그러나 콘텐츠 등의 생산자 역할을 생각하면 어떤가?

현재 모바일 디바이스 시장에서 삼성, LG 등이 분전하고 있고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에도 현재 기세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대기업의 생산력 향상과 성장은 국가 성장에는 플러스 요인이다. 그러나 국민 개개인 복리와의 연관성은 크지 않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기업과 개인의 동시 성장은 반드시 일치하는 게 아님을 충분히 경험했다.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사라지는 ‘프로슈머(prosumer)’를 제시했고 2006년 『부의 미래』에서 이 개념을 상세히 설명했다. 쉽게 말해서 소비자이자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방점은 ‘소비자’에 찍혀있다. 일반 대중은 생산자 역할을 쉽게 할 수 없다.

스마트폰의 좋은 사용자라고 해서 콘텐츠 생산자가 되는 게 아니다. 흔히 말하는 대박 날만 한 것을 발명했다고 하더라도 발명자 개인의 성장에는 이바지했을망정 부의 분배라는 측면에서는 ‘일’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는 혜택을 떠먹여 줘야 간신히 받아먹을 수 있는 수동적인 디지털 소비자 세대와 일상에서 사용자 역할은 준수하게 수행하나, 생산자로는 거의 실패한 능동적인 디지털 소비자 세대가 공존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종종 생산자 역할을 감당하면서 수익을 창출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첨단 기술과 기계를 잘 다룰 줄 몰라서 일자리를 잃고 다시 얻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대체로 이런 경우 재학습을 강조하지만, 기술의 발전 속도를 생각할 때 인간의 학습능력으로 얼마나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지는 의문이다.


디지털 식민지

거리를 지나다 보면, 여기저기 국비로 관련한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학원이나 직업학교들이 눈에 띈다. 당장 미봉책은 될망정 궁극적이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술자가 필요해서 기술만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학 수준의 발상이다.


이미 우리는 2차 산업혁명 시대에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경험이 있다. 이후 해방됐지만 냉전 시대와 3차 산업혁명 시대를 지나는 동안에는 미국의 힘 아래서 보내야만 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체적인 무지를 방치하고 궁극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지 않는 한 ‘디지털 식민지’가 될 가능성은 늘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이제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가 다가온다. 선진국은 앞다퉈서 미래의 주도권을 가져가겠다고 혈안이 돼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워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도 선진국들의 계획을 분석한 책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구체적인 계획을 준비하는 것 같은데, 국민도 모르게 비밀리에 준비하는 듯하다. 후에도 살펴보겠지만, 사용자가 모르는 계획이나 실험은 무조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물론, 현재 상황에서 거시적인 계획 틀은 국가의 몫이다. 지역 차원에서는 지방자치 단체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선진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미국의 ‘브레인 이니셔티브((BRAIN Initiative)’를 제외한 독일의 ‘인더스트리 4.0(industry 4.0)’, 일본의 ‘일본 재흥’, 중국의 ‘제조 2025’ 등이 국가 주도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왜냐하면, 민간 차원에서 새로운 혁명을 주도하기에는 변화의 규모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더라도 다양한 구성원으로 조성한 ‘거버넌스(governance)’에서 심도 있는 토론을 우선해야 한다.

국가 주도형 성장 시대가 오랜 과거의 기억이 됐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국가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국민과 그들을 포퓰리즘으로 끌고 가는 국가가 여전히 건재하다. 이런 앞과 뒤가 막힌 상황이 계속되면, 새로운 식민지 시대를 도둑처럼 맞이할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 시대, 행복한 미래일까?

통신 기술은 10년마다 한 번씩 발전해서 그 전송 속도가 100배, 1,000배 수준으로 빨라지고 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적응을 위한 인간의 사고 능력,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역량이 같이 빨라져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새로운 기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세대가 발생했다. 대부분이 우리 부모님 세대, 현재 6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다. 현재인구 비율로 보면 약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려, 이 비율은 점차 늘어나서 2040년이 되면 40%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2040년대는 우연히도 레이 커즈와일이 『특이점이 온다』에서 말한 기술과 인간이 융합 – 트랜스 휴먼(trans-human) - 되는 시대이다. 커즈와일은 기술 낙관주의자여서 모든 인류가 행복할 수 있는 유토피아(utopia)를 말하지만, 디스토피아(dystopia)도 가능하다.


기술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는 계층과 국가가 존재하는 반면, 그 혜택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계층과 국가도 존재할 것이다.

앵거스 디턴은 『위대한 탈출』에서 “경제의 성장과 발전이 인류의 불평등을 감소시킨 부분도 있지만, 완전히 불평등을 없애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그 혜택을 받는 국가나 계층과 그렇지 못한 국가와 계층들의 불평등은 감소시키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과학 기술이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혜택이 대다수(보편적) 인류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브랑코 밀라노비치의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에서는 “부의 편차가 더 심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부의 편차로 인해 종국에는 새로운 물리적 저항이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불안함을 전한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속도 중요하지만, 삶의 주체로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행복추구권은 생존권 못지않게 중요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디지털 적응은 생존뿐만 아니라 행복 추구와도 관련이 있다. 하나의 예를 보자.


L사의 IoT 광고


소개할 광고는 치매기가 있는 한 노모와 안타깝게도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아들이 나온다. 스마트폰으로 확인할 수 있는 IoT로 어머니의 투약, 외출 등을 수시로 살펴볼 수 있다. 혹 어머니의 활동이 거의 없다고 판단되면 바로 119에 신고할 수도 있다.

어머니를 직접 모시지는 못해도 IoT로 계속 어머니의 병세를 확인할 수 있는 기술적인 방법이 있음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려고 애썼던 광고였다.

이 정도 상황이면, 집에 혼자 거주하게 하는 것보다는 요양원에 모시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실제로 IoT가 설치된 장소는 어머니의 집인데 관리는 아들의 스마트폰이었다. 어머니는 설치된 장비로 관리받는 사람이지 사용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지 못하는 어머니와 그 기계의 사용으로 어머니를 수시로 확인하는 아들.

이 광고로도 ‘디지털 격차’의 문제점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모자(母子)는 행복할까?


5G 시대가 활짝 열렸다. 4G 시대에 이미 적응에 실패했던 우리 부모님 세대는 더 낯선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반면에 ‘디지털 원주민’ 세대는 새로운 기술의 혜택을 자유자재로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카카오톡만 할 줄 알면, 스마트폰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마트폰으로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서 돈을 버는 사람도 있다. 페이스북이 16억이 넘는 회원을 거느리는 동안에도 우리 부모님 세대 대부분은 아직도 페이스북을 모르신다.

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삶에 공헌하는 바가 적지 않았지만, 그만큼 세대 차이, 계층 차이를 조성한 것이다. 국가 차원으로 확장하면, 기술을 개발하고 전파하는 국가가 기술 수용 국가나 아직 여건이 되지 않는 국가에 비해 훨씬 많은 부를 챙겨 국가 간 차이도 더 벌어질 것이다.

국가가 복지 예산을 늘려 국민의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은 당연하고 권장해야 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존만을 위해서 살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행복의 관점은 주관적이어서 획일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고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면서 살 수 있다는 안도의 한숨이, 작은 행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 : 조연호, 편집 : 안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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