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백의의 민족이라는 말이 있었다. 흰색을 좋아하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어릴 때, 백의의 민족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항상 태극기를 떠올렸다. 태극기는 흰색 바탕에, 검정색, 붉은색, 푸른색이 섞여 있었다. 백의의 민족이라면,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에 더 많이 흰색이 칠해저 있어야 하는거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물론, 의문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혹, 누구한테 이 말을 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니까. 작가는 깨끗한 백의의 민족을 생각한 거 같다. 흰색은 곧 한(恨)을 상징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없는 무채색 바탕에 점이라도 찍으면 바로 티가 나는 깨끗한 도화지, 그렇기에 누군가 이 여백에 좋은 그림을 그려주기 바란다. 그러나 현실은 아름다운 수묵화보다는 네온싸인 무지개 빛의 점을 찍어 버린다.
《흰》은 줄거리를 요약하기 힘들다. 작가는 단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서술했다. 그 이야기는 평범하지만, 슬픔, 아픔, 괴로움을 담고 있다. 굳이 왜 이런 한의 정서를 표현했을까 질문을 던져보지만, 알 수 없다. 작가는 세상을 즐거운 눈으로 보고 있지 않다. 그리고 죽음을 덤덤하게, 하지만 독자가 읽었을 때는 그 아픔이 잔잔하면서도 깊숙하게 전달되도록 담담하게 쓴다. “스물여섯 살 난 남편은 어제 태어났던 아기를 묻으러 삽을 들고 뒷산으로 갔다.” 아내는 스물세 살이었다. 부모도 어리지만, 태어난 아이는 하루살이처럼 하루를 살다가 또 다른 세상으로 소멸한다. 작품은 비장미가 없다. 그냥 일반적 삶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다. 차라리 슬픔상황에 과도하게 몰입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했다면, 그 문장을 보고 독자는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가 바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상상이라도 한 듯,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서술한다.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간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슬픔, 아픔, 괴로움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눈물도 흘리지 못한다. 작가는 인생을 무모하다고 말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계속 나누면서 작품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졌다.” 하늘은 정신이고 땅은 육체일까? 작가는 삶과 죽음을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 했을까? 이런 오해를 막기 위해서 작가는 ‘경계가 사라졌다’라고 말한다.
죽음이 맴도는 자리
작가는 그래도 삶의 의지를 보여준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 사이에서 그래도 삶 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다. “죽지마. 죽지마라 제발.”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절규는 삶의 의지다.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한 자식의 비통한 죽음에도 부모는 죽지마라고 소리 친다. 죽음을 다루는 글은 우울할 수밖에 없다.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무거워지고, 머릿속은 죽음이 맴돈다. 작가는 죽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살라고 말하는데도, 왠지 억척스러운 삶의 의지가 죽음을 일상화 해버린다. 삶과 다른 게 아니라 항상 같이 있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도 죽음이 주는 무거움을 독자는 활자를 좇아가면서 느낄 수밖에 없다. 담담하게 속삭이는 듯한 작가의 마성에 독자는 작품을 다 읽었을 때쯤에는 내용과 관계없이, 책을 덮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왜 무거워야 할까?
왜 작가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더 무거운 표현으로 독자를 힘들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시론》에서 ‘카타르시스’를 말한다. 작품을 통해 느끼는 감동과 전율, 해소 등을 의미하는 말인데, 카타르시스는 주로 웃음을 주는 희극이 아니라 비통감을 주는 비극에서 더 크다고 말한다. 행복에 겨운 마음은 한 번의 웃음으로 끝나지만, 비통, 애통, 슬픔, 괴로움 등은 그 여운이 더 크며, 그 감정들이 해소될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훨씬 더 크다는 게 오래전 철학자의 주장이다. 실제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도 그렇다. 즐거움과 웃음만 잔뜩 담겨진 콘텐츠는 볼 때는 즐겁지만, 기억에 남는 건 거의 없다. 그러나 슬픈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 아픔이 시청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작품 속 인물에 그대로 몰입하게 된다. 작가의 작품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에는 해소되는 부분이 없다. 그저 슬픔, 괴로움, 아픔에 몰입 되었다가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그 느낌을 일상에 가져간다. 많은 사람이 《채식주의자》를 기분 좋게 손에 쥐고 읽었다가 낭패를 봤다고 한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거부감이 들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더 심하게는 구역질이 났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찌 보면, 글일 뿐이다. 그저 창작물이다. 작가의 경험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지만, 얼마만큼 경험이 녹아졌는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읽는 독자와는 상관없는 경험인데도 독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바로 이게 작품의 힘이다. 한강이라는 작가의 힘은 활자로, 독자의 격한 반응, 충격 등을 끄집어내는 데 있다. 작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스시스를 독자가 경험하지 못하도록 서서히 페이드어웨이 한다. 글을 멈춘다. 그래서 작품에서 우리는 어떤 해결도 기대할 수 없다. 어떤 것도 해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뻔한 결과라도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어려운 마음이 들게 한다. 그리고 이런 글 쓰기는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보여주는 의도적 글 쓰기랑 차이가 없다.
“영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흰》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고르라면 필자는 윗 문장을 선택할 것이다. 퀴즈 하나를 내 보겠다. ‘시간’의 반대말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답은 ‘영원’이다. 시간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흐름이다. 그러나 영원은 시간이 아니다. 인지할 수도 없고, 결코 도달할 수도 없다. 작가는 ‘영원을 가질 수 없다’라고 말한다. 왜? 다 죽으니까. 그런데 영원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삶의 년수는 달라도 죽음에 이르는 건 모두 같다. 작가는 모두 같기에 위안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마침표를 찍었다면, 우리는 작은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런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다고 말한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개인의 삶은 다름을 의미한다. ‘흰’은 한이자, 어쩔 수 없이 더렵혀지는 백지와 같다. 아마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더 조심해야 하고, 원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다가 더럽혀지면, 어느새 순백을 포기하고 먼지가 묻은 게 평범한것인냥, 살아 가게 된다. 시간 속 ‘흰’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된다. 거대 권력에 저항하는 민중의 삶, 그 삶이 지금은 평범한 대중의 삶으로 변질되었다. 아픔을 기억하고, 부당함에 저항했던 민중은 죽음을 망각한 채 오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속물로 살기로 결정했다. 영원하지 못하기에 모두 같다고 생각했던 인간이, 이제는 유한한 시간 속에 특별하게 살기로 선언한다. 평범한 언어로 쓴다면, 달라졌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작가는 틀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독자는 한강을 읽으면 우울할 수밖에 없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혹은 삶의 방식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답을 주지 않는다. 틀렸는데, 그 문제의 해결을 독자에게 짐 지워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