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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작가Join Oct 25. 2024

작가 한강 읽어보기 4편

《희랍어 시간》 : 소멸해 가는 이데아

세 인물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이혼녀이자, 작가이자 강사이다. 그리고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등장한다. 이 사람은 희랍어 강사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말을 잘 못하는 희랍어 수강생이다. 세 인물 모두 부족한 사람들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작가는 한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머지 두 인물은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이다. 이 세 인물을 통해 작가는 연결되지 않은 듯하면서도 굳이 나눠지지도 않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작가의 실험정신일까? 나래이션하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희랍어 였을까? 답을 찾아보자. “동기가 어떻든,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와 말의 속력이 대체로 느리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희랍어는 배우기 힘든 언어이다. 그리고 배운다고 하더라도 거의 쓸모가 없는 언어이다. 거의 사용하지도 않고, 어려워서 원전을 읽는 학자들이나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언어이다. 그리고 희랍어는 천천히 배워야만 한다. 천재가 아닌 한 빨리 배울 수 없는 언어이다. 이런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이 있어야 한다. 급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이렇게 천천히 배우는, 더욱이 쓸모없는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이 많다는 의미, 혹은 충분한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심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다른 말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거나 가진 게 없는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런 언어를 배우는 사람이 감정을 드러낼 이유가 없다. 성낼 필요가 없고 즐거워할 이유도 없다. 사회적으로 두드러지는 사람들이 아닐테니까.     


소멸의 이데아를 찾아서     

희랍어는 고대 그리스의 언어이다. 우리는 그리스를 떠올리면 소크라테스를 떠올리고, 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을 생각한다. 화이트 헤드라는 현대 철학자는 “모든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다”라고 말해서 플라톤의 위대함을 찬양하기도 했다. 이에 맞설 수 있는 철학자는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정도인데, 그조차도 스승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플라톤 철학의 키워드는 이데아이다. 플라톤의 대표작 중 하나인 《국가》에서 이데아를 소개하는 데, 이데아를 실재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것들의 실재이고, 우리가 보는 현상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조금 부연하면, 진짜는 이데아뿐이라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다. 그러나 작가는 “만일 소멸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야.... 그건 깨끗하고 선하고 숭고한 소멸 아닐까?”라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세계의 철학이었더 시절, 이데아는 실재였다. 그러나 현대에서 희랍세계, 희랍언어는 소멸의 세계이자, 소멸의 언어인 셈이다. 플라톤의 철학을 그대로 적용하면, ‘소멸의 이데아’도 존재할 수 있다. 사라지는 것의 이데아는 아주 잘 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작가의 말처럼 ‘깨끗하고 숭고한 소멸’이다. 

다시 작품의 인물들을 보자.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서서히 시각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은 이미 말을 잃었다. 종종 등장해서 독백하는 작가는 아이를 잃었고 자존감을 잃었다. 이들의 소멸은 깨끗하고, 선하고 숭고한가? 작가의 질문이다. 이데아는 아름다운 것, 실재하는 것이라면 소멸하는 것의 이데아도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현실이 그렇냐고? 작품 중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는 자신의 시력이 좋지 않고 점점 좋아지지 않고 있는 사실을 알리지 말아주기바란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의미 없는 부탁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말 못하는 여자는 어차피 누구에게 알리지 못한다. 이미 소멸중에 있는 이들의 시력과 언어는 도대체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 것일까?     


세상이 실재가 아니라서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작가가 보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이데아를 언급한 순간부터 세상은 거짓이 된다. 그런데, 이데아를 추구하고 지향하기도 어렵다. 플라톤은 《국가》에 동굴의 우화를 넣었다. 그림자 세상에서 살다가 우연히 진짜 세상에 나간 사람이 다시 동굴로 돌아가 진리를 이야기했을 때,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는 말이다. 진짜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했고, 성경에서는 예수가 했다. 그런데, 이 둘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에 작가는 소심하게 저항한다.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신에 대한 부정은 곧, 이데아에 대한 포기일 수 있다. 아무리 선한 것을 추구해도 그 선한 것 이전에 맞닥뜨리는 것은 악과 고통이며, 그 가운데 무고한 사람이 희생된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7초 만에 1명이 굶어 죽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몇 년 째 계속되고 있다. 중동에서도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이 연이어 발발하고,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 있다. 정작 전쟁을 선동해서 일으킨 사람들은 버젓이 잘 먹고 잘살고 있는데, 그러지 않아도 삶이 힘든 사람들이 더 힘들어지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굳이 해외의 상황을 보지 않아도 된다. 대한민국의 현실도 만만치 않다. 법이 있는 것인지, 양심이 있는 것인지, 도대체 저런 사람들을 왜 우리 손으로 대표라는 직함을 주고 선출해야만 하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 작가는 신의 성립을 부정했다. 선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다면, 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이데아는 환상이며, 오히려 거짓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현실이 실재며, 그곳의 고통과 애환이 진짜라는 것이다.     


‘0’으로 나아감     

마지막 챕터의 제목이 ‘0’이다. 0은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0이 존재한다. 어쩌면 존재의 시작은 0에서 시작할지도 모른다. 유럽에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0층이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1층부터 시작하지만, 그들은 0에서 시작한다. 논리적으로는 서양이 맞다. 0에서 1로 향하는 거리가 있으니, 당연히 모든 시작은 0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 생각에는 0은 무이지만, 서양 사람들은 0은 시작이고, 0이 없으면 어떤 숫자도 올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두 주인공은 시력을 잃고, 말을 못 한다. 이들은 0이 아니라 마이너스(-)이다. 그런데, 둘이 연합하면 한 사람은 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볼 수 있기에 0으로 나아갈 수 있다. 건물로 표현하면, 지하에서 0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실제로 둘을 연결해 주는 장면은 어두운 지하에서 이루어졌다. 두 사람의 만남을 0으로 향하는 길로 작가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강의 작품 중에서 이 정도로 긍정적인 작품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둘이 연합하면 0이 될 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전개. 그러나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게 긍정의 호흡을 내뱉고 있진 않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끈질기게 숨을 쉰다는 의미는 산다는 의미다. 현실이 어떻든 일단 살아 낸다는 각오이다. 그러고 나서, 첫음절을 발음한다는 의미는 선언이다. 나는 살겠다라는, 혹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에 대한 선포이다. 그러나 이런 삶의 의지와 용기는 눈을 떴을 때는 사라져 있을 수 있다. 완벽한 니힐리즘은 아니지만, 허무함을 감당할 용기가 있어야 눈을 뜰 수 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지르는 소리는 방향성이 없다. 그러나 눈을 뜨고 전달하는 소리는 방향이 명확하다. 삶의 방향은 이데아를 향해 나아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작가는 이데아를 소멸하는 것으로 본다. 그게 희랍어이다. 그리고 희랍어 시간은 서서히 더 소멸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한강은 역사의 아픔과 슬픔, 잔혹성에 현대인의 허무감을 표현한 게 아닐까? 점점 이데아를 잃어가는 현세대의 비극을 다루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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