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를 보자(4) : 돌덩이에서도 꽃은 핀다
독재가 문제일까?
독재는 좋은 게 아니다. 민주주의가 더 우월한 제도이다. 적어도 대부분 국가의 역사에서는 그랬다. 플라톤의 ‘철인 통치’는 그가 비판했던 중우정치, 민주주의에 밀린지 한참 됐다. 물론, 여전히 독재 국가는 버젓이 존재한다. 북한이 70년 넘게 세습 독재를 이어가고 있고, 푸틴의 러시아도 독재 국가이다. 민주주의 국가이긴 하지만, 일본 경우 보수당인 자민당이 전후 거의 제1당으로 건재했다. 그리고 싱가포르도 대표적인 독재 국가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대부분 독재는 부패를 낳는다. 권력의 수명이 오래될수록, 클수록 부패 정도가 더 심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12년을 통치한 이승만 정권과 18년을 통치한 박정희 정권의 부패 수준이 다른 정권과 비교했을 때 크다.
그러나 정치적 영역을 벗어나 다른 영역의 발전은 정치적 미숙과 다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싱가포르이다.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 이래로 1당 통치를 유지하고 있다. 즉, 단 한 번도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 인민행동당(人民行動黨, People's Action Party)이 제1당이며, 수상도 인민행동당에서 선출한다. 대표적인 수상이 바로 리콴유(Lee Kuan Yew)이다.
싱가포르의 현재 위상은 탈아시아 수준으로, 세계에서도 내로라하는 강소국으로 안착했다.
우리 지역 사회는 민주주의 선거 절차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지만, 실제로 독재나 다를 바 없다. 지방선거가 다시 시작한 이후 호남과 영남은 선호하는 당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물론, 경남과 울산, 부산 등은 현재 집권당의 인사가 단체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보수당의 위세가 강한 지역이다. 호남은 말할 필요 없을 정도로 일방적이다.
정치적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좋은 의미로 정치적 안정이 계속됐다. 그러나 다른 영역의 발전 역시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성장과 발전이 별로 없었다.
실질적으로 합법적인 독재라고 할 수 있다. 유사한 정치적 상황을 겪었음에도 싱가포르는 선진국으로 발전했지만, 우리 지역 사회는 그렇지 못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싱가포르의 청렴지수는 세계적인 수준이고,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결과만 봤을 때 싱가포르는 1당이 50년 동안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독재 통치를 했어도 국민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우리 지역 사회는 ‘미워도 다시 한번’ 식으로 계속 찍어 주다가 융합의 21세기에도 여전히 남북과 동서의 갈등을 겪고 있다.
바꿔야 하는 상황인데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우선 기성세대의 폐쇄적인 성향, 그리고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 등이 그 원인이고,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호남이 영남과 비교 했을 때 훨씬 발전했다면, 기존 정치 세력을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역 사회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다 보니,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친다. 쉽게 동쪽은 보수, 서쪽은 진보라는 이상한 논리로 편을 나누는데, 사실상 지역 사회는 정치적 보수나 진보를 따질만한 근거가 거의 없다. 굳이 따지자면, 향토적인 색채가 강하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변화와 혁신
싱가포르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혁신과 변화의 길을 준비했다. 그래서 결과론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미래가 더 기대되는 도시가 됐다. 그러나 우리나라 지역 사회는 혁신과 변화에 대한 담론은 무성하지만, 실천은 없다. 그래서 천천히 퇴보의 길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서는 국가가 긍정적인 변화를 주체적으로 이끌고 간 적이 없다. 항상 시민이 주체적으로 변화를 희망할 때, 새로운 변태 과정이 진행됐다.
미래를 위해서 역사의 노고를 잊자는 게 아니다. 다만, 과거에 집착해서 변화를 거부한다면, 암울한 미래가 펼쳐질 게 뻔하다. 조선 말기 쇄국정책은 변화를 거부한 집권층의 무지함과 만용에서 비롯됐다. 결과는 나라 잃은 슬픔을 35년 겪어야 했다. 이후도 미국의 원조에 의지해서 버텨야 했고, 곧 냉전의 전장으로 사용되는 아픔을 또 경험해야만 했다.
새로운 시대에 식민지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현재 대한민국의 위상이 G20 수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언제라도 IMF 상황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코로나 19’방역 우수 국가로 알려졌지만, 최근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국가를 신뢰하지 못하는 – 확진자 수를 조작하고 있다고 믿는 - 국민이 있고, 신앙을 빙자한 파렴치한 – 헌금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 부류들이 등장하고 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대구광역시에서의 1차 대유행에 이어 최근 감염은 일부 폐쇄적인 개신교 집단이 2차 대유행을 이끌었다.
변화는 열린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괜찮겠지’가 아니라 ‘나도 조심해야겠다’가 열린 마음이다. 신을 인질 삼아서 벌이는 인간의 촌극은 종교의 권력이 강했을 때는 ‘마녀사냥’으로 등장했고, 그 세력이 줄었을 때는 극단적인 폐쇄적 성향으로 일부 신도가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말로는 항상 소멸이었다.
‘코로나 19’의 상황은 신뢰가 무너지고 합리적인 에너지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 국가의 현실은 지역 사회에 더 압축된 폐쇄성으로 자리하고 있다.
수백 만년 닳고 닳은 단단한 돌덩이에서 싹이 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하다. 독일의 대작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주인공이 사랑을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간단히 말하면, 사랑은 단단한 바위에서 예쁜 꽃을 피울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니 나름대로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 느낌을 나누려 한다.
단단한 바위가 수백 만년 풍화돼 작은 돌이 되고, 그 돌 역시 긴 시간 끝에 작은 흙이 된다. 그 흙밭에 우연히 작은 씨앗이 날아와 잘 정착하면 그제야 싹이 나고 꽃이 필 수 있다. 물론, 바위에서 꽃이 피는 것만큼 오랜 시간이 걸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긍정적인 선전은 대부분 시민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한 소식들이 두 귀를 홀려서 듣게 하고 머리와 마음속에 남는다. 그러다 보니, 변화를 긍정적으로, 혹은 도전적으로 맞이하려는 시민보다는 현 상황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수구적인 시민들이 보편적이다.
이런 상황을 기존 정치 세력은 꾸준히 이용하려 한다. 지역 사회일수록 안정을 강조하고 선전한다. 변화가 필요한 시기의 안정은 곧 퇴보하는 길이며, 소멸의 첩경(捷徑)임을 알아야 한다. 변화는 정치 세력이 달성할 수 없다. 역사를 보자. 대변혁은 시민의 힘이었지, 정치 세력의 힘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싱가포르는 국가의 힘이 시민을 이끌고 가면서 발전을 이뤄냈다. 처음부터 발전의 주체가 국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르다. 발전의 주체가 항상 시민이었다. 시민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크고 행동으로 분출했을 때 변화의 바람이 기존 세력을 몰아내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수 있었다.
단단한 돌덩이에서도 꽃은 필 수 있다. 단,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의 주인공이 시민이 돼야만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고 발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