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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유전자, 나의 유산.

책과 글

by 윤트리


바다와 알송, 달송이를 모두 제왕절개로 출산한 나는 자연분만의 해방감을 느껴보지 못했다. 더 이상의 임신 계획은 없으니, 아마 평생 모르고 살리라. 그래서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걸까. 작은 물고기가 지나가듯 잔잔하고 간지러웠던 바다의 첫 태동은, 곧 배꼽을 밀어내는 힘찬 발차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초음파 화면 속에서 발을 구르던 알송이, 태동검사를 할 때마다 딸꾹질하던 달송이. 이 모든 순간들은 지금도 유화처럼 선명하다.


아이의 얼굴을 보면 출산의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가슴이 찌릿하게 돌던 초유와 함께, 가족과 지인들이 쏟아낸 축하 메시지에는 어김없이 한 문장이 따라붙었다. 바로 남편과 나 둘 중, 누구를 닮았는지에 대한 본인들의 의견이었다. 낳은 나도 아직 모르는 얼굴을 사진 한두 장으로 단정하는 것이 신기했다.


아들인 바다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남편을 닮았다. 커다란 눈, 짙은 눈썹, 쌍가마, 넓은 흉곽까지 - 가끔은 남편이 내 배를 빌려 스스로 낳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딸 쌍둥이에 대한 반응은 나뉘었다. 겉쌍꺼풀로 태어난 알송이는 남편의 어린 시절과 쏙 닮았고, 나도 쉽게 인정했다. 유전자 대결 스코어 2:0. 하지만 나를 닮은 달송이를 보고도 남편 쪽 친인척들은 여전히 남편을 닮았다고 주장했다. 서운함이 밀려왔지만, 친정엄마의 말이 나를 달랬다.


예뻐서 그러시는 거야. 너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어.


그 말에 담긴 사랑과 유머를 떠올리며 웃어넘길 수 있었다.




나의 하드웨어는 엄마에게서, 내 소프트웨어는 아버지에게서 왔다. 두 사람의 삶이 나를 통해 이어진 것이다. 아버지는 노래를 즐겨 부르고, 시를 낭송하던 자유로운 사람이어서 내 삶에 예술을 불어넣었다. 엄마는 뿌리같이 단단한 성실과 나무 그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나누어 닮아 지금의 나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외모나 성격만이 아니다. 내가 겪었던 삶의 빛과 그림자, 그 속에서 내 힘으로 찾아낸 소중한 것들을 물려주고 싶다.




|첫 번째 유산, 책 읽기


어린 시절, 부모님은 도매상에서 제철 과일과 김치를 떼다 파셨다. 트럭 보조석에 앉아 동요를 부르다가 장사할 동네에 도착하면, 나는 자연스럽게 운전석 뒤의 공간으로 이동해 책을 읽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서 책이 유일한 놀이였다. 책 속에서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야만 했던 그 시간이 나를 책과 가까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부모님도 책을 읽으셨고, 그 모습이 나의 독서 습관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되어 발길 닿지 않은 평야를 방황한다. 고궁의 밀실에서는 잊힌 진실을 쫓고, 활자 속에서 닿을 수 없는 우주를 손끝으로 만져본다. 살다 보면 허무맹랑한 선택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책 속에서 나 대신 그 길을 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현실에 발을 붙이고 덜 우둔한 선택을 해왔다. 나는 이 책이라는 삶의 쉼표를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가슴에 물음표가 차오를 때마다, 책을 읽고 느낌표를 얻거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말이다.




|두 번째 유산, 글쓰기


학교 급식이 맛없다며 엄마에게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도시락을 들고 다녔다. 도시락 반찬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가 종종 써주신 쪽지들은 또렷이 떠오른다.


사랑한다. 좋은 하루 보내.


같은 짧은 문구들. 맞벌이라서 더욱 바쁜 엄마가 시간을 쪼개어 남긴 메모가 내 하루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나는 말보다는 글에서 진심을 느낀다. 그래서 학기 초마다 아이들의 담임선생님들께 편지를 쓴다. 아이들의 기질과 특성을 담아 편한 시간에 읽을 수 있도록 정성껏 쓴 글은 언제나 세심한 답으로 돌아왔다.


가끔 남편에게 서운한 일이 있을 때도 카톡으로 마음을 전한다. 아이들에게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고, 목소리로 감정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서며 여과된 단어를 고르기 위해서다. 이렇게 일상의 글쓰기가 아이들에게도 전해지길 바란다. 하고 싶은 말을 무턱대고 전하기보다, 상대의 상황을 헤아리며 전하는 것도 배려라는 마음과 함께.




남편을 빼닮은 아이들의 눈. 그 맑고 깊은 호수 어딘가에 나의 흔적도 스며있기를 바란다. 세 개의 탯줄로 이어졌던 시간을 되짚으며, 넉넉히 키운 내 마음이 아이들에게 닿기를 소망한다. 가지를 뻗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전하면, 양분 삼아 자라기를 꿈꾼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아이들의 삶이 다채롭게 변모할 과정을 그리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책을 읽고 느끼는 감동을 글로 쓰며 정리하는 기쁨은 삶에 풍요를 선사한다. 언젠가 너희가 내 마음의 유산을 품고 자유롭게 비상할 때. 나는 그 바람을 느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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