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짝사랑을 끝내는 고백처럼 비가 쏟아지던 여름이었다.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아이들과 빗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씀하셨다. 집으로 돌아와서 목욕을 마친 아이들에게 물었다.
"빗소리 들었지? 비가 얼마나 많이 왔어?"
숫자를 잘 모르는 아이들.
"백개, 백개, 백개!"
이렇게 지저귀며 손가락 열개를 접었다 폈다 반복했다.
"맞아, 비가 많이 왔지?"
웃으며 말하는 순간, 달송이가 말했다.
"그 비만큼 엄마를 사랑해."
막 목욕을 마친 달송이는 보송보송한 얼굴에 두 뺨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달콤한 로션 향기를 풍기는 아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음에 깊게 새겨졌다. 분명,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기억할 영롱한 순간이었다.
작년 겨울, 훌쩍 자란 바다를 위해서 새 외투를 샀다. 바다는 빨강이나 파랑 같은 짙은 색을 좋아하는데, 내 취향대로 민트색을 골랐다. 혹시나 아이 마음에 들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다야, 옷 색깔 마음에 들어?"
씩 웃으며 나를 바라보던 바다의 대답에 감탄했다.
"응. 내가 엄마 사랑하는 마음 같다. 그렇지?"
하마터면 오답이 될뻔한 나의 선택은 아이의 보드라운 대답 덕분에 청량한 정답으로 바뀌었다. 내 마음을 살피고 던진 말이 아닌 걸 알지만, 아이가 고요하고 상냥한 바다를 품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올해 초,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다가 아이들이 움트는 매화를 보고 소리쳤다. 봄을 맞이해서 상상도 새롭게 피어난 걸까.
"엄마! 나무에 팝콘이 있어!"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슬며시 미소를 깨물고 말했다.
"그건 매화야. 이제 봄이 오려나 봐."
그러자 알송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봄님이 오시나 봐!"
아, 눈부신 표현. 동요 ≪봄님≫에 '봄님이 오시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라는 구절이 있다. 아마 이 노래를 떠올리고 저런 말을 했겠지. 나는 봄을 기다린다고 하면 벚꽃엔딩과 도다리쑥국을 떠올리는데, 아이들의 눈에는 이렇게 맑고 경이로운 봄이 담기는구나.
삶의 잔혹한 얼굴은 아직 보지 못한 덕분일까, 아이들의 언어는 맑고 포근하다. 오롯이 마음 가는 대로 말해도 36.5도의 온기를 머금은 문장이 되어 나를 울린다. 나는 종종 바란다. 이 타고난 고결함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세상의 참혹한 조각들이 아이들의 언어를 빼앗지 않기를. 그리고 내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사랑의 말들 또한, 오래도록 남아 빛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어쩌면, 아이들의 따사로운 말속에서 내가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