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아채 May 30. 2024

법정에서 잃어버린 것

인간성

판사 앞에 서는 변호사는 언제나 긴장하기 마련이다. 제 아무리 준비서면을 빡빡하게 써서 나갔더라도, 판사가 어떤 부분에서 의문을 가질지, 어떤 점을 더 보완하라고 요구할지 예상치 못하는 것이 변론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내가 저년차 변호사라서 그럴수도 있겠다).      


그날 재판은 당연하게도 '종결'이 예상됐었다. 피고는 변호사를 선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원고(우리측)쪽 준비서면만 마지막으로 나간 상태. 사무실을 나서며 '오늘 사건 종결시키고 오겠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나갔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말이 피고 변호사 입에서 흘러나왔다.

"피고 당사자가 사망했습니다."     




"아…피고가요? 피고가 꽤 젊던데."     


잠깐 침묵이 흐른 뒤, 판사가 입을 뗐다. 피고는 젊은 30대 여성이었다. 종종 당사자가 나이가 너무 많으면 소송 중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젊은 30대 여성이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게, 저도 좀 갑작스러워서…지금 가족들도 경황이 없는 상태라, 상속인들한테 물어봐서라도 서면 작성을 했어야 하는데 어려운 상황입니다."     


짐작컨대 피고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 같았다. 원고에게 듣기론 피고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채무 상환 압박을 받고있는 상태였다. 이 사건 역시 피고가 패소할 것이 눈에 불보듯 뻔한 소송이었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피고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아 코너에 몰렸던게 아닐까.      


"그럼 우선 변론은 속행하는 걸로 하죠."     


판사는 잠깐 생각하더니 피고 소송대리인에게 반박할 기회를 주겠다며 변론을 속행했다. 아, 나는 원고에겐 뭐라고 얘기해야하나. 순간 머리가 하얘진다. 원고는 오늘 재판이 끝날거라고 확신하며, 내가 전화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피고가 사망했습니다. 변론은 속행됐어요. 혹시, 사망 사실…알고계셨나요?"     


나는 최대한 조심스레 원고에게 물었다. 원고와 피고는 10년 넘게 같은 동네에서 살아온 이웃사촌이었다. 원고와 피고는 함께 문화센터에도 다니고, 애들 유치원도 같이 보내며 가깝게 지냈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엄마들 모임 사이에서 '원고가 바람을 피운다'라는 헛소문이 돌았다.      


피고는 그 소문을 그대로 믿어버렸다. 믿기만 했으면 다행이었을텐데, 상대적으로 잘 살던 원고를 평소에 질투했던 탓인지 피고는 소문을 적극적으로 옮기고 다녔다. 원고는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피고가 자기 험담을 앞다투어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민·형사상 모든 조치를 취했다.      


그들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다는 건 나 역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원고의 말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럼 우리가 더 유리해진거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친했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앞에 느껴야 할 당연한 슬픔이나 충격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길 수 있다’라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만이 서려 있었다.      


“네…. 뭐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사실관계를 제대로 알 수 없으니… 변호사가 피고 남편에게 사실관계를 물어서 서면을 작성한다고 해도 반박하는데 좀 어려움이 있겠죠.”     


나는 답변을 하면서도‘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이 소식을 듣고 뭔가 충격을 받거나, 아니면 ‘안됐다’라는 반응을 하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앞으로 소송을 어떻게 마무리 해야할지, 위자료는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상속인들에게도 이 재판 결과의 효력이 미치는지 따위를 신경썼다.    

  

그날 나는 사무실에 돌아와서 한동안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변호사로서 나는 사건과 사람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편이 아니다. 어떤 변호사(특히 내 남편)는 사건에 몰두하는게 심해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열심히 했는데도 의뢰인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을 때, 혹은 성심성의껏 해주었는데도 의뢰인이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껏 이 일을 하면서 사람이 넌덜머리난다거나, 인간성에 대한 회의감을 느껴본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 재판을 다녀와서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조차 법정의 유리함을 따진 것에 깊이 회의감이 들었다.      


법정에서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승리와 패배의 문제일 뿐이다. 누가 승리하고 지느냐의 문제는 ‘삶, 죽음, 인생’과 같은 가치를 뛰어넘을 수 없다.


피고의 어리석은 행동에 피해를 입은 원고는 이 싸움에서 분명 이길 것이다. 그렇지만 원고가 그 과정에서 인간성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녀를 진정한 승자라고 볼 수 있을까. 이 소송 끝에는 무엇이 그녀에게 남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마음 속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나 역시도 법정에서 인간성을 잃고 있는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이전 10화 인테리어 공사 중에 집이 팔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