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는 3월에서 5월간 매우 바쁘게 움직인다. 겨울 휴정기를 지나 2월 법관 및 검사 인사이동 시즌이 지나고 나면 밀린 일처리가 한꺼번에 쏟아지기 때문인데, 덩달아서 변호사들도 일거리가 늘어난다.
이 시기는 어쏘 변호사(고용 변호사)에게는 지옥의 기간. 나도 5월 초쯤 일에 치여 한 번은 회사에서 밤을 새기도 하고, 매일 법원에 꼬박꼬박 출석하며 변론을 하기도 했다.
의뢰인들은 지금껏 재판부가 기일을 잡지 않고 미뤄두었던 재판이 잡히면서 변호사 사무실을 찾는 일이 잦다. 어제 나와 술잔을 기울인 남승연 대표도 그런 의뢰인 중 한명이었다.
남대표는 고급 인테리어만 전문적으로 시행하시는 사람이다. 그는 굳이 영업을 하지 않고 피라미드 절친한 친구들의 소개를 통해 일을 해왔다. '친한 지인의 소개이니 뒷통수는 치지 않겠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그렇게만 흘러가던가. 모든 사람들이 의리를 지키는 사회라면 이미 '법조계'는 망했을거다. 남대표는 재작년 이맘때쯤 강남의 고급주택에 거주하는 부부의 인테리어를 맡게 되었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부부의 요구사항이 도를 지나쳤다.
'이거 이렇게 바꿔주세요.'
'사모님, 벌써 설계변경이 5번째인거는 아시죠?'
'아, 추가비용은 걱정 마세요. 나중에 다 지불할게요.'
그는 나중에 이 부부가 어떻게 이 돈을 지불하려고 하는지 의아했지만, 30억대 고급주택을 떡하니 자가로 가지고 있는 부부인데 뭐가 문제겠냐싶어 이내 생각을 접었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다섯번의 설계변경 끝에 본격적으로 인테리어에 착수하려고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부부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사장님, 저희 집 팔았어요.'
'아니 그게 무슨소리에요. 집을 팔면 인테리어는 어떻게 해요?'
'공사계약 취소할게요. 착수금 돌려주세요.'
반 년이 다되어서야 남대표는 부부가 집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미 팔린 집에 공사를 하겠답시고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계변경 5번에, 그동안 그가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던 기간까지 생각하면 이미 받은 공사 착수금 8,000만 원은 부부에게 절대 돌려줄 수 없는 돈이었다.
그러나 부부는 안하무인으로 나왔다. 끝끝내 그를 상대로 착수금 8,000만 원을 돌려달라는 소를 제기한 것이었다.
처음 법원은 남대표에게 4,000만 원을 돌려주라는 취지의 화해권고결정을 내렸다. 부부는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남대표는 변호사 없이 혼자 대응을 했고, 제대로 된 주장 정리를 못했던 탓이었으리라.
그도 돈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귀찮은 소송을 계속 끌고가기보다 착수금 반절을 돌려주고 이대로 소송을 끝낼까 하는 마음이 불쑥 솟았다.
그런데 참 억울했다. 그동안 부부의 비위를 맞추며 설계 변경을 해왔던 것은 물론이고, 이리저리 자재들을 알아보러 뛰어다녔던 시간들도 아까웠다. 남대표는 '고급 인테리어'를 하는 기술자로서의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 부부에게 4,000만 원의 착수금을 돌려주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법원의 제대로된 판단을 받아보자는 결심이 섰다.
그렇게 그는 자신있게 '승소할 수 있겠는데요?'라고 얘기한 우리 사무실에 사건을 맡겼고, 나는 열심히 사건을 검토했다.
상대방은 억지 주장을 계속해서 펼치고 있었다. 그들은 남대표가 인테리어 공사를 불성실하게 했으며, 계약 조건을 지키기 않았다는 뻔한 거짓말을 늘어놨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 법원이 이런 말들을 들어줄리는 없었지만, 읽는 변호사도 의뢰인도 기분이 좋지 않으니 하나하나 반박해주었다.
한편 남대표는 인테리어를 위해 열심히 일한 증거들을 모두 기록해두는 사람이었다. 그는 착수금 8,000만 원을 허투루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재를 구입할때 모아둔 영수증들은 증거가 되어 법원에 제출되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남대표가 반소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방적인 상대방의 도급계약 해제로 인해 착수금 외에도 기성금 등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검토했었다. 그런데 '의리'로 계약을 해온 남대표의 계약서에는 상대방에게 책임을 지우는 내용보다 본인에게 불리한 내용이 더 많았다.
우리는 반소는 포기하고, 상대방의 공격을 잘 방어해내는데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우리는 승소했다. 원고는 항소까지 진행했지만 항소심 역시 우리의 승리. 재판부는 원고들의 주장이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의뢰인은 억울함이 해소되었다면서도 술자리에서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지금껏 신의를 지키면서 사업을 해왔는데, 이렇게 된통 당할줄은 몰랐네요. 근 3년간 고통받게 될거라곤...'
그리고 계약서에 자신의 권리보다 소비자의 권리를 더 중요하게 써두었던 자신이 후회된다고 했다.
'남대표님은 좋은 의뢰인이 되시기는 그르셨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한테 좋은 의뢰인이란,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시는 분들이 좋은 의뢰인이거든요. 남대표님은 소비자를 위하는 마음이 크셔서, 더이상 사건에 안휘말리실것 같아요.'
함께 술자리를 가졌던 변호사님은 남대표에게 위로의 한마디를 건넸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가 잘못된게 아니다. 그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 나쁜 인간인 것이지. 그런 의미에서 남대표는 우리에게 '좋은 의뢰인'은 되지 못할거라며 그는 웃었다.
남대표도 '에이 그래도 인생 어떻게 될줄 알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대꾸는 했지만, 나는 안다. 이번에 호되게 당해본 그는 계약서를 수정할 것이고, 또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가 '좋은 의뢰인'보다는 '좋은 사람'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