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알고 있는 결말 속에서도
예로부터 조선은 작은 것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민족의 땅이었다. 탐관오리에 쩌든 몇몇의 자들이 어둠이 되어 백의 민족을 더럽히려 하였으나, 빈번히 백색의 저고리와 갈색의 짚신 앞에 무릎을 꿇었고 점차 나라의 안위와 백성의 평화를 걱정하는 왕의 등장이 늘면서 빛을 따라 살아갈 수 있던 소박한 나라였다.
침략과 약탈보다는 안보와 수호를 위해 살아가던 나라.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하였고, 정의는 반드시 악惡을 이기며, 그릇된 자는 바른 이에게 무너지는 것임을 역사 속에 깊게 새겼던 나라였다. 하나 처음부터 빛이 어느 날 엔가 고개를 들어 작은 이들을 비추었을 리 만무한 일. 어둠이 이었기에 빛이 태어나 어둠과 저울질하며 살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슬픔이 있었고 치욕이 있었다. 패배가 있었고, 조아림이 있었다. 지금과 다를 바 없는 누구도 틀리지 않은 의견의 대립과 중립 속에 고뇌가 있었다. 바로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물결이 일다.
때는 1592~1598년 외세(일본)와 맞서 우리나라 의병과 명나라의 구원병이 힘을 합쳐 싸웠던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이 중국으로 가는 길을 내어 달라는 이유로 우리나라 조선을 침략하면서 전쟁이 일어 났고, 우리나라와 사대 관계였던 명나라는 우리나라를 돕고자 구원병을 파병하면서 일본 대 조선과 명의 싸움이라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명장 이순신 장군과 의병, 구원병의 힘은 조선을 외세로부터 지겨내기에 충분했고 곧 임진왜란은 일단락 된다.
정묘호란丁卯胡亂, 수면 위로 드러나다
하나 그 사이, 북방에 위치해 있던 여진족이 우리의 혼란을 틈타 힘을 키우면서 훗날 '후금後金'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건국 하게 되었고, 명明이 임진왜란이 끝난 후 힘이 약해진 것을 틈타 공격을 감행한다. 명나라는 후금의 힘 앞에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당시 조선의 왕 이었던 광해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실시 하면서 도움을 외면하기에 이른다.
결국,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비판의 목소리를 뱉던 일부 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집권 세력인 '인조 정권'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 후금은 명에서 끝나지 않고 자신의 나라와 우호적 관계였던 광해군을 내쫓았다는 명분으로 조선까지 침략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이 바로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이다.
그러나 아무리 강성하게 힘을 키웠던 후금이라 한들 명과 조선 두 나라를 동시에 침략하면서 마냥 허리를 빳빳하게 세울 수는 없는 노릇, 후금은 조선에게 '형제 맹약'을 제안하는 것으로 한발 물러서기를 택한다.
병자호란丙子胡亂, 그 모습을 모두 드러내다.
약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후금은 더욱더 강성해 지고, 명나라는 그와 대비적으로 힘이 더 약해진다. 당시 후금의 왕은 '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강해지는 자신의 나라의 영향력 앞에 칭호를 '칸'에서 '황제'로 바꾸고 국호 또한 '후금'에서 '청淸'으로 바꾸게 된다.
칭호는 물론 국호까지 바꾼 청나라의 행보는 예상할 수 있듯이 형제 맹약을 맺은 우리나라 조선에게도 관계의 재정립을 요구 하였는데, '형'이 아닌 '아버지의 나라' 즉, 군신 관계를 요구한다.
하지만 조선은 답을 주지 않았고, 이후에 지속적으로 군신 관계를 요구하다 화가 난 청은 답을 주지 않던 조선에게 최후통첩을 한다. 극한의 상황까지 치닫자 조선의 조정은 "청과 좋은 관계를 맺어 훗날을 도모하자"라는 '주화파主和派'와 "명나라가 버젓이 살아 있거 늘 오랑캐와 군신 관계를 맺을 수 없다"라는 '척화파斥和派'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고, 인조는 고민 끝에 '척화파'의 의견에 손을 들면서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이것이 '병자호란'의 시작이다.
남한산성
영화 '남한산성'은 여기서 부터 시작 된다. 강물까지 얼어붙던 12월에 벌어졌던 전쟁은 지역 별로 위치한 성에 들어가 전쟁을 준비하던 우리나라의 의병들을 주춤하게 만들었고, 청은 계절을 틈타 빠른 기동력으로 한양까지 당도한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발 빠른 침략에 강화도로 피신할 길 마저 막힌 인조는 당황하며 남쪽에 위치한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신하게 되면서 47일간의 항전이 벌어지는데, 이곳에서도 인조의 신하들은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대립한다. 그러나 인조는 이전처럼 쉽사리 '척화파'의 손을 들어 줄 수 없었다. 전쟁의 승기가 청에게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화파'의 손도 쉽사리 들지 않았다.
주화파의 이조판서 '최명길'과 척화파의 예조판서 '김상헌'은 누구도 틀리지 않으나 생生과 사死를 갈리게 하는 두 개의 의견으로 인조 앞에서 대립한다.
영화를 말하다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줄거리의 기대감과 반전의 묘미, 재미적 요소는 찾아 보기 힘들다. 이미 결말을 아는 이야기 앞에 궁금증을 품는 이는 지극히 적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가 동원하는 관람객 수를 보면 흥행은 기정 사실화 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한숨이 나오는 일이다. 몇 세대를 거치지 않아도 이미 한 세대에 일어난 1990년 대 후반의 IMF와 2002년 월드컵, 2016년 촛불 시위를 통해 우리나라 국민은 나라에 관련된 일이라면 타 나라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의 결속력과 의지력을 보인 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는 꼭 관람하는 경향으로도 나타나게 되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역사적 사건을 존념存念 하려는 노력이 투영된 행동이니, 너무나 당연하고 좋은 일임에는 틀림 없다. 다만, 그것을 흥행의 목적으로 가볍게 사용하려는 일부 투자자와 제작자의 의도 때문에 걱정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군함도'라는 영화를 관람 후 실망감을 숨길 수 없었기에 더 걱정이 크다.
하지만, 분명히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좋은 결과를 낳던 못 낳던 반드시 우리에게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가 있다. 이것은 흥행을 목적으로 혹은 사실 전달을 목적으로 한들 불변하는 맥락 같은 것이다.
영화 '남한상성'도 예외 없이 뜻을 품고 있다.
결말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어느 쪽의 의견도 절대 틀리지 않기에 더 목을 죄는 고민을 하는 인조의 고뇌와 그것을 자신만의 신념으로 보채는 '김상헌'과 '최명길'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 둘의 신념에는 어떠한 개인의 이득도 없는 오로지 백성을 위한 마음만이 팽배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대립하는 두 개의 의견 앞에 자신만의 신념을 캐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 최대의 대립인 '흑백논리'에서도 우리는 어느 하나 '틀렸다' 말하지 못하고 있다. 범죄자의 인권을 지키냐 마냐의 대립. 북의 지원을 끊냐 마냐의 대립 등 낮과 밤이 갖는 균등한 지배력 앞에 당연한 듯 살아 가는 우리는, 이런 모호한 대립 앞에 어느 하나에 힘을 싣고 '맞다' '아니다'를 말하지 못하고 있다.
영화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의 어떠한 주장과 의견이 아닌, 당신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사는 지를 묻는다. 동시에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며 살 길 바라는 마음을 내비칠 뿐이다.
병자호란의 끝은 인조가 항복하는 것이다. 하나, 치욕은 조아린 왕의 머리로 끝나지 않고, 더 강하게 더 오래 지속된다.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다. 결국, 주화파의 의견을 따랐으나 더 나아진 것은 없었다.그렇담 척화파의 손을 들어 주었다면? 의리, 명분, 원칙을 지켰다 한 들 주화파의 의견을 따랐던 조선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었을까?
어떠한 것도 정답은 없다. 본인의 신념과 흔들림 없는 올곧은 마음만이 진짜일 뿐이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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