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하이 컴백

담담한 어른이 되다.

by 전성배

하루 24시간을 모두 감정에 휘둘리던 젊은 시절은 하루하루를 재해 속에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매 순간이 폭풍 전야였던 삶은 하루아침에 폭풍우를 맞닥뜨리기도 했고, 폭풍 속 태풍의 눈 안에서 잠시 숨을 돌리기도 했다. 미친 듯이 적시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선선한 바람을 대동한 햇빛에 온 몸의 긴장이 풀려 버리는 날도 있었다.


젊은 날의 모든 날은 급변했다. '감정'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에 모든 하루가 휘둘렸다. 내가 나를 잡아 둘 수 없었던 나날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서서히 나를 휘두르던 감정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점점 감정의 조절이 유연해지고, 감정의 절제와 괴로움을 덜어 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30대 후반의 나이가 된 세 명의 멤버들은 감정과의 협상을 모두 마무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일일이 말하기엔 삶은 이별의 연속임을 깨달은 것처럼, 사랑에 절절히 매던 순간들을 묘사하거나 이별 후에 닥치는 슬픔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별하는 것들에 아쉬움을 표하기 보단 담담하게 회상하듯, 이번 9집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에 수록된 곡 들은 하나 같이 억양의 변화를 주기 보단 담담한 어조로 불러냈다.

타이틀 곡 '연애 소설'


사람은 행복했던 순간보다 불행했던 날들을 더 오래 기억한다. 면밀히 파고든다면 대다수의 기억 속에 불행이 행복의 지분을 압도한 적은 없었을 텐데도 스스로 "난 왜 이리 불행한 것일까?"라는 말로 처음부터 행복이란 것이 부재였다고 여긴다.


그것은 사랑을 주제로 이야기할 때 더욱 부각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각자 연애 소설 한 편 정도를 품고 살아가는데, 간혹 그것을 펼쳐 내면 사실상 불행은 이별이 언급된 마지막 한 두 페이지 정도일 뿐임에도, 대부분이 행복으로 채워져 있을 페이지를 단 몇 페이지에 쓰인 이별로 인한 고독감과 상실감에 의해, 슬픈 이야기로 소설의 장르를 구별 짓는다.


행복했던 날들이 한순간에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행복했던 페이지의 수만큼 그리움은 깊어지고, 그 깊이만큼 피는 지혈 하지 못할 만큼 넘쳐흐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 어른이 되었다. 이번 9집 타이틀 곡인 '연애 소설'만 들어 보아도 변질된 행복이 가져다주는 그리움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슬픔에 잠기는 것이 아닌, 인정한 듯 목소리의 볼륨을 일정하게 유지한 채 불러 내고 있다.


특히, 가사 중에 "우리 한때 자석 같았다는 건 한쪽만 등을 돌리면 멀어진다는 거였네."를 부르는 타블로의 목소리에서는 '수긍'의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그리움의 해소를 바라지도, 연인의 복귀를 바라지도 않는 그저 예고 없이 떠오르는 추억들을 책장 넘기듯 하나하나 넘기며, 넘어간 장은 다시 들춰보지 않을 것이란 담대함도 느껴진다.

또다시 한 단계 위를 밟다.


이번 9집 은 에픽 하이가 2014년에 정규 앨범 8집을 내놓은 이후로 딱 3년 만에 발표되었다. 이젠 세 명의 멤버 모두가 유부남이 되었을 만큼 적잖은 나이가 되었지만, 이번 앨범을 통해 들었던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 같이 9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조금의 차이를 말하자면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었던 지난 곡 들과 달리 이번 곡 들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빠른 비트 속에서도 여유가 느껴져, 리스너의 입장에서는 좀 더 편안하게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한 음절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변함없었다. 여전히 곡 하나하나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제각기 다름에도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이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뻔한 사랑 얘기, 그리운 얘기, 돌아와 달라 소리치는 열망 같은 진부한 이야기가 넘치는 젊은 곡 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이젠 '성숙해졌다'는 수식어를 넘어 설명 못 할 계단을 또다시 밟고 올라선 그들은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저 나이가 들어가며 자연스레 이별하거나 멀어지는 것들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이별의 정의는 서로 갈리어 떨어진다는 뜻으로 사랑에만 국한되어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이번 9집을 통해 다시 한번 되새겼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매 순간 찾아오는 이별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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