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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된다는 것

나의 이름을 내려놓다.

by 전성배

성인 팔뚝 정도의 몸집밖에 되지 않는, 말 그대로 갓난아기 한 명이 태어났다. 여인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갖고 산 이십몇 년 만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고통의 시간을 보낸 끝에 한 생명을 낳고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아니, 새로운 이름이라기 보단 과거로부터 이어진 칭호를 대물림받았다. 그 이름은 바로 '어머니'이다.


'엄마'라고 달리 부르기도 한다. 모두 한 사람을 칭하는 단어이나 암묵적으로 어린 시절 내내 엄마로 부르다,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서 자연스레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바꿔 부르게 된다. 그것은 '아빠'라 부르다 '아버지'가 된 그분도 똑같이 겪는 과정이다.

아이는 성별이 다르게 태어났지만 유년시절과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굳이 외적인 차이를 꼽자면 머리 길이의 차이 일정도로.


이 차이는 과거를 거스를수록 더욱 모호해진다. 너나 할 것 없이 까무잡잡한 피부와 비슷비슷한 키,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학교를 진학하게 되면서 점차 차이가 벌어진다. '교복'이라 불리는 개성의 일차적 잠금장치를 통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첫 번째 차이가 생기고, 2차 성장을 통해 더욱더 명확해지며 점차 남자와 여자의 모습으로 성장해 나간다.


그렇게 각자가 지닌 자신의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살아가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될 무렵에는 각자가 지닐 짐에 무게를 자각하게 된다.

각자의 삶에는 누구 하나 다름없이 적당한 짐 한 봇 다리가 주어지게 되고, 각자가 가진 능력은 곧 짐을 감당하는 힘과 연결된다.


이런 얘기만 늘어놓으니 삶이 곧 지옥이란 말이 틀리지 않아 보인다.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삶의 끝에는 보상은 커녕 결국 죽음뿐이라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하나, 그럼에도 우리를 살게 하는 건 각자가 지닌 이름과 그 이름을 더욱 선명하게 하는 연인과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우리도록 하는 가장 선명한 물질적 증거.


나의 부모도, 당신의 부모도 한때는 선명한 증거를 갖고 각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나와 당신을 갖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점차 결혼에 대한 무게감을 실감하는 요즘, 늦은 밤 만난 친구에게서 자신의 친한 지인이 올해로 결혼을 한 지 이 년째이며, 결혼과 동시에 출산한 아이의 나이도 2살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친구는 결혼한 지인에 대한 말을 하는 내내 약간의 부러움과 전반적인 안타까움, 끝을 장식하는 두려움을 순차적으로 말했다.


"결혼을 한다는 건 참 좋아. 뜻이 맞는 두 사람이 하나를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거니까. 그만큼 멋진 일이 또 있을까?"


우리 모두는 천재 발명가 에디슨,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광명의 천사라 불렸던 나이팅게일, 비교적 가까운 시일에 인류에게 충격을 주었던 애플의 아버지 스티브 잡스처럼 인류 모두에게 닿을 궁극의 가치를 이뤄내기는 어렵다. 하나, 두 사람 정도의 궁극을 지향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결혼'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는 무엇이 되는 걸까"

문득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과 두 분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떠올랐다. '성배 아빠' '성배 엄마' 고작 세음절 밖에 되지 않는 편한 이름을 놔두고, 네 음절이나 되는 번거로운 호칭으로 한 평생 서로를 부르고 계신다.


쉬는 날이면, 티브이 앞에 앉아 하루 종일 채널을 돌리는 어머니는 더 이상 '이선옥'이란 예쁜 이름과는 꽤나 멀어진 채 살아가고 계신다. 쉬는 날을 맞이한 지가 한참 전인 아버지 또한 어머니와 다를 바 없이 이름과 자신의 거리감을 체감하며 살아가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나아 기르며 삶을 희생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어떤 생일까. 그분들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자신이 잘되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라는 입만 산 말이 아니라, 진실로 그들의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


마음이 착잡해졌다. 당장 과거 친했던 친구가 결혼 후 온통 SNS를 자신이 아닌 아이의 사진과 걱정, 칭찬만으로 도배하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행복하다는 그들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답답함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목격하니 복잡해질 뿐이다. 이 마음은 이름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이름을 불리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되돌아보게 했다.


나를 나일 수 있도록 하는 건 친구들과 연인뿐 만이 아니라 부모님의 희생이 가장 컸었다.


"결혼은 선택"이라는 말이 있다. 즉,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살아가는 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는 말이다.


나의 부모도 나의 친구도 그의 지인도 모두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본인의 선택으로 인한 고통과 행복은 오직 본인이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니 왈가불가하는 건 지나친 오지랖일 것이다. 걱정을 해주는 것 또한 사치이다. 다만 우리는 그들을 보며 앞으로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부모'라는 존재를 다시금 되짚어봐야겠다.

자신의 이름을 내려놓고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되어 살아갈 수 있는 지를. 삶의 주인은 자신이것만 스스로 자식을 주인으로 앞에 둔 그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자.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그들이 이뤄낸 인류의 업적 따위는 무색할 만큼의 사랑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권은 달콤하다. 모든 걸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은 어느 누구도 손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부모라는 존재는 삶의 권력을 스스로 내어준 이들이다.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위치에서 내려와 힘없는 아이 한 명을 세우고 그의 자력이 커질 때까지 그의 힘이 되어 준다.


인간은 해낼 수 없는 일을 '부모'라는 존재는 그렇게 해낸다.


※ 사진 '와카레미치' iPhone 8 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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