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행복
어떤 영화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영화 속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한 줄거리만 나열하는 이야기는 관심을 끌 수 없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삶에 물을 붓기 시작했던 그 맘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은 험악하고 치열하며, 사랑은 말라 가고, 감정은 딱딱해지고, 개인의 삶이 도태되는 이 삶 속에서 여흥으로 즐길 이야깃거리 정도는, 행복만을 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당시에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가상의 행복에 사람들이 동화되어 모일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치 않았다. 밍밍한 행복보다는 우여곡절 한 삶을, 끝없는 오해의 반복과 시련만 이어지는 주인공의 삶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욕을 하며 모여들었다. "실제의 삶이 고되니, 티브이에서라도 좋은 이야기만 봐야 하지 않겠냐"라고 말하던 사람들은 실제로는 자신보다 더 캄캄하고 날카로운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가졌다.
알 수 없었던 이유는 삶의 중간을 채워가니 자연스럽게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꿈을 이루거나 화려한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간접적인 삶의 위안을 받기 때문에 끌리는 것이 아닌 더 당돌한 이유였다. 그것은 현재의 삶보다 더 못한 삶을 사는 이를 보면서 얻을 수 있는 안심과 심술궂은 심보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이야기 보다 높낮이가 명확한 삶의 이야기에 더 열광한다. 과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심화된 세월 속에서 단순 명료한 행복을 말하는 이야기보단, 복잡하게 뒤섞인 이야기에 더 열광한다.
하지만 때론, 이야기가 갖는 구성인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순 중, 전개에서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 오전, 2016년에 개봉한 일본의 극장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를 우연히 티브이에서 방송하는 걸 발견했었다. 당시에 극장에서 보고 싶었지만, 이래저래 시간이 맞지 않아 상영 기간을 놓쳐 이후에도 보지 못했던 작품이었는데, 그것을 우연히 티브이 채널을 옮기다 마주친 것이다.
초반의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여자 전학생인 <니시미야 쇼코>와 그녀와 달리, 친구들 사이에서 항상 중심을 차지하는 남학생 <이시다 쇼야>는 따분한 것을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시다는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 니시미야가 거슬렸는지, 그녀에게 도가 지나친 장난을 지속적으로 저질렀다. 결국, 니시미야는 전학을 가버렸고, 주변 친구들은 암묵적으로 함께 동조했음에도 모든 잘못을 이시다에게 전가하며, 그를 철저하게 외톨이로 만들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 이시다는 니시미야와 재회하여 화해를 나누며 친구가 되었고, 그녀의 가장 가녀린 감정의 중심이 되었다.
그 후 이야기는 이시다가 저질렀던 과거의 일이 다시금 수면 위로 드러나며, 어렴풋이 알게 된 친구라는 행복과 모호한 사랑의 감정을 빼앗겨 버리고, 다시금 먼 길을 돌아 재회하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나는 이시다가 니시미야와 만나 과거의 오해를 풀고, 그녀의 사랑이 되는 초반의 이야기에서 티브이를 껐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지난 날 보았던 리뷰를 통해 알고는 있지만, 여전히 영상으로 보지 못한 상태이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흔하고 밍밍한 행복의 이야기에서 진도를 멈춰, 그 따뜻한 화해와 이야기를 내가 아는 유일한 결말로 쓰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오늘 하루의 일부를 그 물음에 답을 구하는데 썼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우리가 방심과 뒤통수, 위기와 결말이 뚜렷한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 외에는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에 느꼈던 따뜻함에서 어렴풋이 답을 엿볼 뿐이다. 삶과 다르지 않은 가상의 이야기나, 이 삶보다 더 고달픈 이야기를 통해 얻을 심술 맞은 위안에 지쳤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 화면 속 두 사람이 수년을 돌아 다시금 웃고, 저녁이 밤으로 익을 때까지 함께 잉어에게 빵조각을 던지는 시시한 장면에서 웃음이 났고, 따뜻함을 느껴, 그것을 해치고 싶지 않아 티브이를 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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