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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있게 한 경우의 수

운명

by 전성배

지난 금요일 밤, 우리는 일을 마치고 작은 이자카야로 향했다. 불금이라 불리는 날 인지라 어디를 가든 자리가 없었는데, 다행히 단골 집에는 자리가 있어 무리 없이 앉을 수 있었다. 우리는 늘 먹던 안주와 소주 한 병을 시키고, 길었던 하루를 간략히 줄여 서로에게 들려 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흡사 구연동화를 구사하는 사람처럼 하루의 이야기를 발단, 전개, 절정으로 나누어 나에게 들려주었고, 나는 그저 가만히 그녀의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듣다, 때때로 리액션을 보이며 암묵적으로 "너의 말을 토씨 하나 안 놓치고 귀에 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얼마간 그녀가 이야기를 지속하다 끝맺을 때쯤, 나에게 점잖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더 빨리 너를 만났다면 좋았을걸.. 너무 돌아왔다.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려서 아쉬워"


그녀는 더 빨리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었을 거라는 확신을 갖은 채,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난날의 자신을 꾸짖고 후회하면서, 우리는 더 빨리 만날 수 있었을 거라면서.

사진 '와카레미치' iPhone 8 plus (겨울의 언젠가)

지난날, 책임을 묻는 것 같은 <운명론>이나 그것과 결을 같이 하지만, 책임을 묻지 않는 <결정론>에 대하여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가치 인지에 대하여 대상 없는 질문을 남기기도 하면서. 어쩌면 이것은 종교만큼이나 포괄적인 의미일지도 모른다. 믿건 말건 그건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후회>혹은 <미련> 같은 것을 통해 "과거의 수를 바꿀 수만 있다면"이라는 아쉬움을 말하는 것으로 결정론이나 운명론의 근처를 무의식적으로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곳이 아닌 저곳으로 갔다면, 피하는 것이 아닌 맞섰다면, 지금에 나 혹은 우리는 다른 모습 일 텐데 "라는, 다른 수를 선택했다면 지금을 바꿀 수 있었을 거란 후회나,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 같은 것들을 우리는 수시로 늘어놓으니 말이다.


그녀의 후회를 들으며, 마무리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생각들을 갈무리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을 전하는 것으로, 나 또한 작은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사진 '와카레미치' iPhone 8 plus

"사실 <운명>이라는 단어는 참 배려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운명이 너를 혹은 나를 밝은 쪽으로 이끌었다면, 운명만큼 낭만적인 것이 없지. 하지만 그 반대라면? 운명만큼 잔인하고 서글픈 것은 없을 거야. 그러니 운명은 상대적인 거지. 개인의 판단으로 존폐가 결정되는 인간 아래에 있는 숱한 가치들 중 하나에 불과한 걸 거야.


나는 현재의 내 모습과 너를 만난 지금이 좋기에 <운명>이 있다고 생각할게. 그리고 그럼에도 운명론이나 결정론이 아닌 자유 의지를 통해 지금의 운명을 완성했다고 믿어. 네가 스스로 선택한 지난 시간들이 쌓였기에 지금에 닿을 수 있었던 거야, 우리의 삶은 탑을 쌓는 거잖아. 애초에 더 빨리 닿을 수 없는 거야. 각자의 상황 속에서 몇 번의 이탈과 몇 번의 헛걸음, 몇 번의 바른 선택을 통해 쌓아진 시간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거지. 그러니 지난날을 후회하지 말자.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지난날의 너에게 좋은 미소만 남기자. 우리를 만날 수 있게 한 시간들이잖아."


모든 경우가 점철되어 지금을 이룬다고 믿는다.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의해 이 삶이 결정되고 정해지는 것이라면, 너무도 슬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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