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들

감사하는 삶

by 전성배

서걱 서걱, 얇은 커터 칼의 등에 엄지손가락을 댄 채 한 겹 한 겹 굵직한 살을 파내며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성인 되고 나서 처음인 것 같았다. 연필을 잡는 것과 그 연필의 첫 머리를 칼로 깎아 내는 일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바닥에 하얀 종이를 깔아두고 그 위에서 연필의 갈색 살을 파내어 캐낸 흑심을 삭삭 소리로 공예가처럼 다듬으며, 심을 뾰족하게 만드시던 날이 생각난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신기해하던 어린 나는, 그것을 눈으로 배워 직접 실천을 해봤지만 애초에 바르게 서있던 흑심마저 삐뚤게 깎을 뿐이었고, 연필의 살을 너덜 너덜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성인 되고 8년이나 지나 다시금 해보니, 마치 늘 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날 나의 경심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아버지의 연필과 같은 모양새로 깎아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며 배우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고 기억이 길잡이를 해주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가장 원초적인 것은 본능과 직결되는 식욕과 성욕, 소유욕 등이 그러할 것이다. 하나,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상대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언사를 구사한다거나 전등을 갈고, 몇 가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 정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상대적인 것이니, 이 외에 각자 개개인이 배우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익혀 할 줄 아는 <나만의 패시브>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사진 '와카레미치' iPhone 8 plus

먼 기억의 언저리에서 맴돌 만큼, 그 시발점을 알 수 없는 자신의 경험들은 우리의 삶을 틈틈이 메꾸며 지탱한다. 살아감에 필요한 각자의 방법 같은 것으로 모양을 갖춘 채.


사랑을 하는 방법과 이별하는 방법, 잊고 잊히게 하는 단호함과 때론 이기적이어야 할 때를 구별하는 법, 배려와 순응, 희생. 이러한 것들도 모두 배우지 않았음에도 그간의 삶과 기억이 길잡이를 해주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이다.


아버지의 연필을 자연스럽게 깎아 내기 시작하면서, 그간 알게 모르게 나의 삶을 채우고 있던 것들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때론 감사하며 사는 삶에 대하여 단순한 접근이 필요함을 느끼는 바이다. 삶을 사는 일은 순간순간 경험과 노하우, 방법을 요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에, 익숙하기에 무심해졌기 때문이다. 그 무심해진 것들이 우리의 삶에 주요 부품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살 수 있게 하는 것들, 그것을 떠올리며 오늘 밤을 마무리하려 한다. 그렇게 감사하는 삶을 오늘 밤 이룬다.


INSTAGRAM / PAGE / FACE BOOK / NAVER BLOG (링크有)

※ 詩와 사진 그리고 일상은 인스타와 페이스북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 그가 만난 농산물을 보고 읽고 먹을 수 있는 곳 http://smartstore.naver.com/siview

※ aq137ok@naver.com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단순 명료한 행복의 이야기